6월 7일자 2650호 <가톨릭신문>과 1021호 <평화신문>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는다. 천주교회 존재의 근거이며 자기표현의 극치인 미사가 뒤집어졌다. 그것도 공권력과 용역업체의 손에서 말이다. 미사를 위해 함께 있었던 사제들은 욕설과 폭행 속에 길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과 성직자에게 가한 모욕에 대한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은 ‘공무집행’과 ‘국가발전’에 방해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그득하다.

5월 29일 아침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용산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교계신문은 6월 7일자 보도시점을 맞아도 말없는 벙어리였다. 교계신문이 외면하는 문제에 대해서 입을 대자면 끝이 없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자신들이 지향하는 종교의 핵심을 누군가가 능멸하여도 그것이 욕됨인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그것을 제 꿍꿍이로 분석하고 해석하기만 즐길 뿐 애당초 예수라는 존재는 온데간데없는 것이다. 어쩌면 사건에 대한 취재 착수조차 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 세상은 갈 때까지 간 것이며, 교계신문은 여기까지 온 것일까? 정말 우리에게 미사란 무엇이란 말인가?

용산에서 5월 29일 아침 벌어진 일을 굳이 같은 날 행해진 노무현 16대 대통령의 영결식과 연관시키지 않는 다해도 고약한 날짜와 시간대의 ‘공무집행’이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6월 1일 보도한 내용을 시간대로 다시 본다. <06:30 이강서 신부님, 철거민 세입자를 위해 미사 집전. 용역반원 50여명 현장 집결. 07:00 법원 집달관 도착 및 용산경찰서 간부들 주변 상황 보고 07:30 용역반원, 집기 철거하기 시작. 이강서 신부님 강제집행 부당함을 지적하며 미사집전 중이니 물러갈 것을 호소. 07:45 용역반장, 이강서 신부님에게 욕설과 협박. 07:50 용역반원, 문정현 신부님의 출입 저지하며 쓰러트림. 용산경찰서 관계자 수수방관. 07:55 집달관과 용역반원, 건물 안에서 집기 들어내기 시작 08:10 용역반원, 세입자 강제 퇴거 및 이강서 신부님 길거리에 던짐. 문정현 신부님을 엉덩이로 깔고 앉고 무릎으로 짓이김. 08:35 집달관과 용역반원 철수.>

교계신문이 용산참사 현장에 상주하지 못하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온라인뉴스에서 사건을 알았다면 당연히 확인취재를 할 필요가 있었다. 교계신문 뉴스가치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른바 ‘광주사태’ 보도 때도 우스운 일이지만 <가톨릭신문>의 제일성이 “성직자․ 수도자 전원 무사”였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관심이 없다면 무엇이 뉴스가치란 말인가? 은퇴하신 연로한 사제와 서울교구 빈민사목담당 사제가 길바닥에서 나뒹굴고 미사현장은 풍비박산이 나더라도 교계신문에서는 한 마디 다루지도 않고 있는 것이 한국가톨릭교회 기관지의 현 주소이다. 6월 7일자에 <가톨릭신문>은 ‘무의미한 연명치료중단에 대한 용어정립’을 1면에 올리고, ‘감사와 사랑운동만이 대안이다’라는 사설을 쓰는 것은 정말 할 말이 없다. <평화신문>은 서울이라는 같은 구역에서 벌어진 일과 교구에서 맡긴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제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도보 성지순례’를 1면에 올리고, ‘예수성월을 맞으며’로 시작하는 사설에 대하여 무엇이라 비평해야 할 것인가? 정말 할 말이 없다.

열을 식힐 겸 영화이야기 하나 하자. 1989년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열릴 즈음 개봉된 「로메로」란 영화가 있었다. <엘살바도르>라는 나라의 독재 정권하에서 자유와 정의, 평화와 인권을 외치며 가난한 자, 핍박받는 자의 편에 섰다가 결국 1980년 3월 24일 미사 중 암살당하는 ‘오스카 로메로’ 주교에 관한 실화였다. 그 영화의 압권은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아길라레스본당의 그란데신부가 살해된 후 공권력이 그 성전을 점령한다. 로메로 주교가 그 본당의 성체를 옮기려 하자 군인들은 감실에 총을 쏘아 산산이 부서트린다. 주교는 벌벌 떨리는 몸을 굽혀 성체를 줍고 차를 타고 떠난다. 그러나 잠시 후 주교는 다시 돌아와 그를 기다리고 있던 민중들 앞에서 제의를 입고 성당으로 들어가 미사를 집전한다. 그리고 그는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강론을 한다. “여러분이 교회이고, 여러분이 하느님 백성이며 예수입니다. 바로 여기 이곳에서 예수는 여러분 안에서 수난 받으십니다.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그러하셨듯이......” 그곳 군인들은 차마 미사만은 막지 못하였지만 지금 이 땅에서는 미사조차 안중에 없다.

그래, 교계신문 말대로 아니 교회전례대로 예수성심성월에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는다. 무엇이 우리를 예수성심으로 이끌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일치하게 하는가? 로메로주교가 1977년 12월 5일 말한 것은 지금여기에 있는 모든 교회언론인들이 새겨야 할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침묵을 지키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만한 가벼운 것을 전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을 전하는 용기를 갖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께서 견진성사를 통해 부여하시는 용기를 갖고 그 분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꼭 필요한 용기를 갖도록 촉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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