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비밀과 포퓰리즘
(마이론 페레이라)
대부분의 나라가 민주주의를 최선의 정부 형태 가운데 하나로 열망하는 가운데, 이들은 모든 민주 정부는 긴장 속에 통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긴장은 두 뿌리에서 나온다. 부패와 혼란이다.
민주주의는 (소수만 부패해서 처먹는) 과두정치와 달리 부패를 널리 퍼뜨린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주장이 반영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곧바로 혼란을 낳는다. 그래서 모든 민주주의는 이 혼란을 뚫고 모든 부패를 쓸어 버릴 “백마를 탄 사람”, 즉 강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비밀리에 열망한다. 나폴레옹이나 아돌프 히틀러, 도널드 트럼프나 나렌드라 모디(인도 총리) 같은 사람. 민주주의에 내재한 이 영원한 유혹은 바로 선동정치가의 등장이다.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단어를 쓴다. 포퓰리즘(Populism), 즉 반 엘리트주의적인 민중영합주의다. 포퓰리즘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너무 참을성이 없고 또한 자신들을 대리하는 이들(엘리트들)에게는 아주 화가 나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한 쉬운 해결책이다.
포퓰리즘은 대중의 직접적 의지를 표현한다. 이들이 투표한 대리자들을 통해서가 아니고, 권력을 (아마도 합법적으로) 쥐었지만 이 권력을 “외국인을 쫒아내겠다”, “이 나라를 다시금 위대하게 만들겠다”, “불법 소득을 환수해서 인도 국민 한 사람당 150만 루피씩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맘대로 휘두르는 한 사람을 통해서다. 이런 공약은 쉽게 들리지만 대개는 실현하기가 불가능하다.
역사를 보면 언제나 포퓰리스트 정치인(또는 선동정치가)이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한 예다. 원래 그와 한 편이었던 공화주의 원로원 의원들이 그를 암살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나폴레옹도 그렇고, 히틀러도 그렇다. 그들은 야심 때문에 갈수록 정복전쟁에 매달렸고, 그래서 결국 자신의 나라를 파멸시켰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서구의 만성병이 아니라 인도의 병이라고 할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가 정부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밀어주지 않고 대신에 손쉽게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하고 사람들이 가장 깊은 곳에 지닌 공포에 들맞추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선동정치가가 들어선다. 인도에서는, 마지막 중요한 포퓰리즘 지도자는 인디라 간디 총리(1966-77, 1980-84)였다. 지금은 현 총리인 나렌드라 모디의 차례다.
지금 시대에 포퓰리즘이 예전보다 더 쉽게 인기를 얻는가? 그렇다, 그리고 이는 미디어 때문인 것이 크다. 모든 포퓰리스트는 중간 단계를 건너뛰어 대중과 직접 접촉하기를 원한다. 히틀러는 대중 집회와 라디오를 통했고, 트럼프와 모디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이용한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피한다. 어떠한 정치적 라이벌도 참아 내지 못한다. 자신의 당을 지배하고, 민주적 절차들을 무시해 버린다. 연설 스타일은 조야하고 천박하다. 사실, 이들은 대부분 사람이 공개적으로 얼마나 무례할 수 있는지의 한계를 시험하고는 별 손해도 없이 사태를 마무리한다. 모디는 자신에 대한 질문이 나올 수 있는 의회보다는 자신이 찬양 받는 대중집회를 더 좋아한다. 그리고 나치는, 우리가 알듯, 의사당을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첫 걸음은 미디어를 통제하고 진실을 억압하는 것이다. 언론인들이 “반국가적”인 것은 아무것도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신호가 보내진다. 즉, 지도자가 원하는 것을 국민도 또한 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슬로건이 논쟁을 대신한다. “인도는 인디라이고, 인디라는 인도다.” “빈곤 청산.” “힌두 중심의 황제.” “한 민족, 한 인민, 한 지도자.”(히틀러)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트럼프)
이러한 지도자의 정부가 한번 권력을 잡으면, 모든 비정부 조직들은 도끼날을 맞는다. 특히 정부에 비판적인 단체들, 또는 외부와 연계된 이들이다. 포퓰리즘은 본래부터 헌정주의와 그 가치에 적대적이다. 다수의 의지에 대한 억제, 견제와 균형, 소수약자의 보호, 심지어 기본권조차도 모두 저주 대상이다. 그래서 권력을 쥔 포퓰리스트들은 민주적 제도들을 체계적으로 약화시킨다. 인디라는 (자신에게) “충실한 사법부”를 원했고, 트럼프는 (자신에게 불리한 뉴스 대신에) “대안 사실”을 주장하며, 모디는 꼭두각시를 골라 정부 요직에 임명한다.
포률리스트들은 공직에서 성공하는가? 처음에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신의 영광을 이루기 위한 목표들이, 때로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까지, 따로 있다. 지지자들도 곧 이를 명확히 알아차린다. 왜 “세상에서 제일 높은 동상”을 세운다거나, “이 나라에서 제일 빠른 기차”를 만든다거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이 된다거나 하기 위해 우리는 선동정치 지도자들에게 빠져드는가. 이 모든 것은 위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대중을 속이거나 갈수록 안 좋아지는 현재로부터 대중의 눈을 돌리기 위한 연막이다.
모든 포퓰리즘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인디라 간디는 “외세”가 자기 정부를 흔들려고 한다고 했다. 히틀러는 “더러운 유대인”을 매도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주민들이 미국의 여러 문제의 원인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들을 막아 낼 거대한 장벽을 세우겠다고 서약한다. 그리고 나렌드라 모디는 모든 소수약자를 다 적대한다. 이슬람인, 그리스도인, 달리트(불가촉천민), 부족민.... 그리고 여성.
히틀러는 유대인을 절멸시키기 위해 잘 조직된 비밀 계획을 실행했다. 모디는 사설 폭력단과 폭도들이 자신의 경쟁자를 겨냥하도록 허용했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지속적인 공포 상태에 있게 한다.
그렇다면 왜 포퓰리즘은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가?
모든 민주주의 정치는 긴장 속에 통치한다. 자유보다 안정을 우선하는 전체주의 국가와 달리 민주주의는 늘 혼란 속에 있다. 왜? 자신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은 누군가 일부 유권자가 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포퓰리즘이 거센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세계 경제가 침체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대형 금융기관들과, 이런 기관들을 운영하는 엘리트들을 경계하게 됐다. 또한 오늘날의 난민 위기는 서구 국가들의 간섭 정치의 결과이지만 서구 자신은 난민이 생겨난 원인과 자신이 관련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정부에 더 큰 발언권을 갖기를 원하지만, 또한 국민국가를 운영하기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깨닫고 있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던진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포퓰리즘 지도자인가? 부패한 교황청 관료조직의 음모를 그는 대중에 직접 호소함으로써 잘 뒤집었는가? 그 답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마이론 페레이라 신부는 예수회 소속으로 인도 뭄바이에 있는 언론 전문가다.)
기사 원문: https://www.ucanews.com/news/modi-from-democracy-to-demagoguery/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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