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담긴 전례력을 따라 - 박유미]

'오 구세주여, 하늘을 여소서!', 베아테 하이넨, 1993. (사진 제공 = 박유미)

서로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
부와 명예, 행복을 향해
서로 소외된 채, 스스로 소외된 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하늘이 열리며 빛이 비추인다.

엄마 품에 평화롭게 잠든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마리아와 이들을 따스하게 감싸 보호하고 있는 요셉.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여 구세주가 세상에 오시도록 한 중재자 마리아는 예수 아기를 품에 안고 저 멀리 빛이 인도하는 곳을 응시하고 있다.

예수가 나아갈 길을 바라보고 있는 듯.
앞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과 반대로 요셉은 사랑이 담긴 눈으로 아기와 마리아를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사랑을 돌아보고 사랑으로 돌보는 곳, 원초적 사랑의 공동체 가정으로 대표되는 이곳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된다.
영원한 사랑의 빛이 비추인다.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연결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대림절에 그리스도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의 성탄을 준비한다. 더불어 또 다른 차원에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린다는 의미도 지닌다. "주님 탄생하시기까지의 시간", 또는 "주님 (다시) 오시는 시간"이라 부르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대림절은 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초대교회 때엔 대림절을 11월 11일부터 성탄(1월 6일, 주님 성탄이 알려진 주님 공현 대축일)까지 사순절과 같이 단식과 보속의 시간으로 보냈다. 서구지역을 그리스도교화하며 태양신의 숭배를 그리스도와 연결해서 토착화하면서 서방교회가 점차 12월 25일을 성탄일로 관철하게 되자, 6세기 그레고리오 1세,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대림 주일을 4주로 정했다. 주님 오시기까지 4000년의 시간을 기억하는 의미를 담았다. 1917년 이후부터는 대림절 단식을 교회법적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주님의 길을 준비하여라!”에 따라 많은 이들이 스스로 보속하고 실천하는 방식을 찾도록 한다. 

전통적으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깨어 있는 시간이 되도록 기억하는 전례와 풍습이 있다. 세상에 빛이 오도록 낳으신 어머니, 성모님을 기억하고 기리는 로라테-미사와 대림환, 주별로 환희의 신비를 보여 주는 구유, 그리고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대림 달력. 그리고 성탄 전 마지막 7일, 오시는 주님께 집중하며 매일 새로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O – 주님호칭기도'. 가장 가까운 과거를 전통으로 생각하게 되는 만큼, 우리에겐 가장 가까운 과거에 만들어진 전통, 대림환이 가장 익숙하다. 하지만 자연과 가깝게 지내며 삶의 모습 하나하나에서 더 가깝게 빛의 의미를 담았던 지난 전통을 되돌아보면 오늘 우리를 덮고 있는 어둠에 어떻게 빛이 비춰 오고 어떻게 밝혀질 수 있는가를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듯하다.    

로라테 미사 (사진 제공 = 박유미)

전통적으로 성탄전 한 달 동안 일주일의 어느 하루, 아직 어두운 첫 새벽에 마리아를 기리는 '로라테’(Rorate) 미사를 드렸다. 요즈음은 대부분 저녁에 하지만, 어둠 속에서 촛불만을 밝히고 드리는 촛불 미사다.

"Rorate, caeli, desuper et nubes pluant iustum : 하늘아, 높은 곳에서 정의를 이슬처럼 내려라. 구름아, 승리를 비처럼 뿌려라“(이사 45,8)로 미사를 시작하므로 이 말씀의 머리를 따서 로라테-미사라고 한다. 이 구절은 "구원이 피어나게, 정의도 함께 싹트게"로 이어진다. 

성령의 짝이 되기를 받아들여 세상이 빛이 오도록 예수 아기를 태중에 모시고 있는 마리아를 기린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의미 있게 새겨진다. '하늘을 열어 이슬을 내리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신비와 생명을 잉태하기까지 몸에 담긴 자연의 생리를 연결해 주며 '여성의 본질이 축복'이라고 노래하는 힐데가르트처럼 생명을 낳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힘이 되는 구절. 그러면서 어머니의 출산처럼 생명을 주고 성장하게 하는 이슬과 비는 하늘에서 선물로 내려진다는 것을 함께 담아 깨닫게 한다. 그 선물은 인간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 안에서 구원이 피어나고 정의가 싹트게 한다는 것을.   

'대림절'이란 이름이 이미 그 의미를 담고 있듯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개혁으로 예수 아기를 잉태하고 있는 성모님을 기리며 드렸던 로라테 미사에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Rorate…. 하늘이여 열리소서. 높은 곳에서 정의를 이슬처럼 내리소서“에 Maranata!(주여 (어서) 오소서!) 초대 교회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기를 기다리며 드렸던 기도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더 분명히 보도록 한다.

대림 1주, 쾰른 마리아 리스 성당의 구유. (사진 제공 = 박유미)

어두운 세상을 상징하듯 어두운 교회 안에서, 이 모든 어두움을 밝히시는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촛불을 밝히고 우리에게 이 빛을, 예수 아기를 보게 하신 어머니 마리아를 기리는 미사. 그 안에서 우리 안에도 'Maranata, 주여 어서 오소서'라는 바람이 더더욱 커지고 강해진다는 것을 일깨운다.

어둠을 밝히는 작은 촛불 하나처럼 그렇게 자신에게도 빛이 다가와 더 널리 비춰 가리라는 희망과 믿음을 본다. 그리고 구유를 통해 환희의 신비 각 단을 오늘의 사회 현실과 삶에 연결해서 나아갈 길을 바라본다.  

작은 촛불들 모인 곳에 더욱 환하게 다가오는 빛을 담아 비추는 것이 대림환이다. 산업화 초기, 돌볼 이 없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 거리의 아이들이 신앙을 지키고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독일 루터교 목사이며 가톨릭의 카리타스와 같은 성격의 기구인 디아코니를 설립한 신학자 요한 하인리히 비헤른이 1839년, 함부르크 기숙시설에 데려와 함께 살며 교육하던 아이들에게 예수님 오시는 날을 함께 헤아리며 기다리도록 하는 뜻에서 작은 초 19개와 큰 초 4개로 환을 만들어 하나씩 밝히며 함께 기도하면서 시작됐다. 

둥근 모양은 부활과 더불어 생명의 영원함, 그리고 녹색의 잎은 희망을, 초들은 그리스도의 빛을 상징하며 빛으로 오시는 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았다. 1860년대에 큰 초 네 개로 만든 대림환이 되었고 1925년 쾰른 가톨릭, 교회에서 처음 이를 도입하면서 1930년 남부 뮌헨으로, 아메리카로 퍼져 나갔다. 가톨릭 전례에서는 대림 셋째 주 영원한 빛을 향하는 기쁨과 희망의 기쁨 주일을 나타내는 뜻으로 셋째 주에는 장미(분홍)색 초를 켠다. 

얼마 전 한일 주교단에서 '동북아 평화를 위한 공동성명'을 냈다. (이미지 제공 = 박유미)

로라테 미사에서 가장 환하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대림환은 작은 촛불 하나하나가 모여 나아가는 곳을 보여 주면서 또 이렇게 모여 환하게 퍼져 감을 더 깊이 느끼게 한다. 깊은 어둠에도 밝혀지는 빛!

얼마 전 한일 주교단에서 '동북아 평화를 위한 공동성명'을 냈다. 그리고 대림절을 맞으며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가톨릭의 역할"에 대한 국제심포지움이 있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앗아갈 수 있는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문제이며 어둠이다. '생명의 존엄성', 너무 당연하고 우선적이라 하면서도,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도록', 어떤 무력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특히 핵무기와 같이 대량살상을 일으키는 모든 무기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요구에는 선악에 대한 판단과 위험,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불가피성 등 힘을 지닌 자들의 여러 조건들이 달린다.  

하늘을 열어 생명의 힘을 주시고 정의가 싹트게 하시는 분에 대한 희망으로, 어둠을 밝히러 오시는 분을 기다리며 그분의 길을 닦도록 일깨우는 시간. 대림절 전통에 담긴 의미를 오늘에 되새기며 빛을 밝힌다. Rorate.... Maranata! 하늘이 열리소서. .... 주님 오소서. 우리 마음에, 이 세상에....

박유미 프리랜서(수산나)
서강대 사회학과, 독일 본, Friedrich-Wilhelm-Uni. 종교사회학 전공, 가톨릭사회론 제1 부전공,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에 대한 시대별 반향으로 본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 연구'. 학문과 일상생활, 교회 안의 신앙생활과 일상의 간격에 다리를 잇는 교육과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이 있으며 전례력과 성인들의 가르침에 담긴 사회적 배경 인식과 성찰을 통해서 사회교리의 보편성과 사회영성 일상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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