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장 최현숙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날은 하늘에서부터 함박눈송이가 춤추며 내려오고 있었다. 달리는 차로 인해 질펀해진 도로와는 달리 인도는 쌓인 눈과 내리는 눈송이로 많이 미끄러웠다. 민주노동당 성소수자 위원회 위원장 최현숙씨-.

위원회 이름만으로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편견 때문일까. 미끄러운 눈길을 걸어 문래동에 위치한 민주노동당 당사에 들어섰다.
 


평범한 아줌마에서 천주교 활동가로, 정치가로 삶의 에너지 분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의 인권을 위해 목청 높이는 전사

두 아들 둔 엄마였던 평범한 아줌마에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장기수후원회 활동과 천주교 여성운동 등을 통한 활동가로, 그리고 정치판에 뛰어들어 민주 노동당 여성위원장 등을 거쳐 성소수자 위원회 위원장을 맡게된 최현숙씨(51세, 아기안나 )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삶을 향한 강력한 에너지가 가감 없이 느껴진다.

정작 그녀는 그런 삶의 궤적들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길이었다고 말한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이 되던 1984년 세례를 받은 최현숙씨는 자기 안에서 현존하는 하느님을 통해 '이웃과 어떻게 나눌지' '무엇을 통해, 무엇을 해야 자기 삶이 행복할까?'를 고민했고, 끊임없이 평등을 향한 변혁을 시도하게 됐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제에 숨이 막혔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려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에, 결혼한 후에는 '남편'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사고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찾는 여정이 쉽지 않았죠, 하지만 예수를 만나면서 깨달아가며 천주교 활동가로 거듭난 삶을 살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평등을 향한 갈망이었습니다. 이웃과의 나눔, 우리 사회에 가장 소외되고 고통 받는 계층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나에게 '사랑하라'라고 말한 것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믿었죠."

세례를 받은 후 성가대를 비롯해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활동 등을 하면서 이웃과의 만남과 나눔의 폭을 넓혀갔던 최현숙씨는 가난한 동네의 주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오히려 그들 삶의 생명력에서 위로받고 행복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고통과 가난 속에 살면서도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속에서 지쳐가는 자신을 씻어내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그때부터 그녀는 인생의 질곡 속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었고, 인생을 즐거운 '놀이터'로 생각하게 됐다.

"하느님이 나를 부르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영적 체험도 많이 했다"는 그녀는 세상과는 다른 눈으로 사회를 거꾸로 보기 시작했고, 이 시대 한국 교회 안에서 신앙인으로서 어느 자리에 설 지를 고민했다. 결국 그녀가 찾은 몫은 가장 철저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 속이었고, 그들이 비전향 장기수들이었다.

때마침 1987년 서준식씨가 비전향장기수로는 처음으로 석방됐고 그녀는 한달음에 그를 찾아가 비전향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몇시간씩 귀담아 들었다. 장기수가족협의회를 만들어 처음에는 소속 본당을 중심으로 소식지도 만들고 후원금도 모집했다. 그러나 곧 본당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의 문을 두드렸다.

" 당시에는 절대적으로 금기시되는 부분이었어요. 비전향장기수는 우리가 사는 세상 저편에 묻힌 사람들이었죠. 절대로 접촉하면 안 되는 부류라고나 할까요. 사상요? 난 그런 것 모릅니다. 빨갱이니 좌파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게 있어 그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이웃이었어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평등을 향한 끝없는 변혁이기도 했구요. 때로 그들이 주체사상을 나에게 주입하고 싶어하기도 했지만 난 받아들이지 않았죠. 조국의 분단이 곧 십자가이고, 신앙적 차원에서 시작한 일이었으니 사상은 그야말로 중요하지 않았죠. 가끔 그들이 사상을 이야기할 때면 빨갱이 이빨이 센가, 예수님 이빨이 센가 한번 해보자는 심정이 되기도 했지요.(웃음)"

장기수 가족 후원회를 통해 정귀남 어머니를 만났다. 정씨 역시 월북한 오빠로 인해 평생 감시를 받으며 살았고, 자신 역시 국가보안법을 위반으로 복역하기도 했다. 서준식씨나 정귀남씨 역시 누구에게도 말 못하던 삶을 최현숙씨를 통해 말하기 시작했고, 비전향 장기수들을 위한 교회 내 활동은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비전향 장기수들이 출소하기 시작했고 ,이인모 선생이 송환되고 많은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으로 가거나 남한에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신나는 일입니다."
천주교 현실 참여 세력이 정치세력화 시도할 때
최현숙씨도 정치에 눈을 돌려


시대가 변했다. 더 이상 사상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이 땅의 민주화와 사회 변혁을 향한 천주교의 현실 참여 운동이 조금씩 정치 세력화를 시도할 때 최현숙씨도 정치에 눈을 돌린다. 교회 안에서의 활동을 떠날 시점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했고, 그녀는 2000년 3월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을 찾아 입당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신나는 일입니다. 천주교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막연한 부채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저런 것은 퍼져나가야 하는데...라는 생각도 많았구요. 어쩌면 그런 부채감이 진보 정당의 문을 두드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자주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랬어요.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민족 개념으로 장기수 후원회 활동을 한 게 아니고 이웃의 개념이었어요. 당연히 다른 사람 옷을 입은 듯 어색했습니다. 그 후 여성위원회 등을 거쳐 지금은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됐지요."

이런저런 활동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 느낀 최현숙씨는 당내 활동을 잠정적으로 그만두고 고등학생이었던 둘째 아들과 함께 인도 여행을 떠났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 떠난 여행이기도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가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이 시대 가장 철저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런 고민 속에서 성소수자 의제가 떠올랐고 그녀는 당내 성소수자들의 활동에 참여한다.

2002년 민주노동당에 '붉은 이반'이 있었다. 이반의 '이'는 다를 '이(異)'이기도 하고 두 '이(二)'이기도 하단다. 첫번째 반인 일반에 들지 못하는 이반(二班)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민주노동당원들을 중심으로 한 성소수자들의 단체였다. 2004년 당 차원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정책 모임이 있었고,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당위원회 '붉은 일반'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최현숙씨는 또 하나의 소외계층인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만났고, 2004년 커밍아웃을 했다.

비로소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인 가부장제를 벗어던지고
'나'로부터 시작하는 운동을 통해 신나는 놀이판 만들 터

"내 안에 또아리 틀고 있던 새로운 성 정체성을 발견하고 나는 또 다른 변혁을 시도했습니다. 이혼을 통해 그동안 나를 옥죄고 있던 가부장제에서 비로소 떠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여성들에게 집단 무의식으로 작용하는 가부장제와 싸울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픈 내 욕망에서 시작된 변혁, 내 정당한 욕망이며 내가 당면한 문제, 즉 '나'로부터 시작하는 운동을 통해 또 한바탕 신나는 인생의 놀이판을 만들어 볼 작정입니다."

최현숙씨는 오는 4월 치뤄질 18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것도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상징성을 고려해 서울 종로구를 택했다. 커밍아웃한 성소수자의 공직 선거 출마는 국내에서 처음이다.

넓은 의미에서 성소수자는 게이, 레즈비언, 성전환자 뿐 아니라 장애인과 노인, 청소년의 성과 지지받지 못하는 다양한 형태의 모든 성 정체성을 포괄하는 용어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성소수자는 남자와 여자로 이분화된 성정체성 안에 포함되지 못하는 게이나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을 일컫는다. 이들에 대한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인구의 5~10%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타인의 문제로 사회의 공감을 이끌어 내며 평등을 향한 변혁을 시도했던 최현숙씨. 이제 자신의 문제를 당당하게 사회에 내놓았다. 하지만 성소수자 문제는 어느 교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주제다. 국회에 상정된 차별 금지법 조항에서 성소수자 항목도 삭제됐다. 기독교 단체의 강력한 저항 또한 현실의 높은 벽으로 작용한다.

"성소수자들의 인권 실태 조사를 할 때 기독교 세력이 가장 반대를 했습니다. 나의 변혁은 예수로부터 시작됐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예수'와 '그들의 예수'는 무엇이 다를까요? 교회법이니, 성서 해석이니 하며 성소수자를 겁박하는 것은 권력의 시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성소수자들이 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법을 들이대고 윤리를 들이댈 때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만, 이 개인의 사랑이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인 국가 권력과 자본에 무참하게 뭉개져버립니다. 교회도 같은 논리를 적용하고 있는 셈이죠. "

최현숙씨는 "궁극적으로 동성애자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국가나 자본으로 대변되는 권력의 환영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정점은 군대를 갔다 온 젊고 힘이 넘치는 남성 노동력이며 튼튼한 청년의 노동력 다음에는 장년의, 그리고 여성과 청소년의 노동력 순으로 순위가 매겨진다. 그 끄트머리 쯤에 장애인의 노동력이 있다."고 노동력 구조를 설명하는 최현숙씨는 "국가가 인정하는 두가지 성-남자와 여자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노동력이 생산되죠. 부모는 자신의 노동력을 투자해 돈을 벌어 아이를 최고의 노동력으로 키워줍니다. 자본주의가 해야 할 일을 가정을 만든 부모가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부모의 노동력이 쇠퇴되면 국가는 그 부모를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고, 잘 다듬어진 새로운 노동력을 활용하면 됩니다. 가족이, 가정이 노동력을 확대 재생산하는 기능을 모두 담당하는 것이지요. 개인의 행복보다 국가의 경쟁력을 높일 노동력으로 국민을 평가합니다" 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사회의 성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차별 금지법으로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저출산으로 국가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하지요? 지금처럼 '최상의 노동력' 만 추구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런 해석이 나오겠지요. 급속도로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고, 저출산으로 인구는 줄어들어 최상의 노동층의 수가 감소하니 국가 권력으로서는 다급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노동력의 확대 재생산을 효율적으로 한다면 인구가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60세 정년 퇴임을 한 인력이나 여성 노동력은 완충지대가 될 수 있어요. 비정규직으로 내몰려 값 싼 노동력만 제공할 수밖에 없는 여성 노동자들, 아르바이트나 일용직 등으로 아무렇게나 써먹다가 내버리는 청소년 노동 인력 등을 정상적으로 노동 시장으로 진입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의 한정된 재화를 골고루 나누면서도 가장 이익이 되는 효율적 노동력 생산 체제를 다시 구비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이지요. 우리 사회의 성체제와 가부장제, 그리고 노동력을 키워줄 안정된 가정의 유지만을 고집한다면 이는 요원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저는 싸울 겁니다. 힘껏, 목소리를 높여 차별 금지법의 싸움을 계속하겠습니다."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그 행복을 나눌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라고 말하는 최현숙씨는 이 놀이판에 함께 참여해 즐거워하든지, 아니면 그냥 구경꾼으로 남든지는 순전히 개인의 몫으로 돌린다. 당분간 4.9 총선을 위해 행복한 발걸음을 내딛겠다는 그녀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삶을 뛰어 넘어 성소수자 문제를 사회 이슈화하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국제 인권과도 최대한 연대를 해서 우리 사회의 성체제와 성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고,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후보를 통해 성소수자 개개인의 상징적 커밍아웃의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최현숙씨. 그녀에게서는 남성이냐, 여성이냐는 이분적 성개념을 뛰어넘어 이 사회를 향해 행복을 외치는 한 인간의 아름다운 향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젊은 시절부터 존재의 의미를 찾아 무던히도 헤맸습니다. 나를 찾는 여정에서 결국 예수를 만났고, 내가 만난 예수님은 늘 '나와 함께 놀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거에 교회에 나가기도 했고, 절에도 다녔지요. 불교나 교회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차이를 인정할 뿐이지요. 그분 안에서 행복하게 노는 것, 그것이 내 관심사입니다. 내 삶을 단숨에 단순화시켜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거든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시각의 차이를 인식해 배려해 줄 때 우리 사회는 그녀가 꿈꾸고, 온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는 행복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상인숙 2008.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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