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1.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는

사례 1. 2013년 12월 23일, 경기도 S 병원 산부인과에서 이란성 쌍생아가 태어났다. 오빠는 건강했으나 여동생은 2.14킬로그램의 미숙아인데다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다. 설상가상, 합병증으로 심방심실중격결손증이라는 선천성 심장 질환을 앓고 있어서 6개월 안에 심장 수술을 받아야 했다. 더 급한 것은 십이지장 폐색증, 당장 막혀 버린 십이지장을 뚫어야 했기에 의료진은 12월 26일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쌍생아의 부모가 경제적 부담으로 힘들어 할까 봐 의료진은 도움을 받을 여러 가지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

그러나 부모는 예상을 거스르는 방법을 택했다. 건강하게 태어난 오빠만 데리고 퇴원한 그들은 그 뒤 일체의 연락을 끊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병원에 둘째를 버려 버리고 만 것이다.

사례 2. 2014년 11월,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 64살 B씨가 실려 왔다. 자택에 쓰러져 있던 그를 다행히 이웃 주민이 발견하고 119 구조대를 불렀고, 구조대원들은 B씨를 구급차로 이송하면서 이미 멎어 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하려고 심폐소생술을 계속했다. 응급실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심정지 상태였지만, 대학병원 측도 포기하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이어갔다.

안타깝게도 그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고 사망 진단이 내려진 B씨의 시신을 영안실 냉동고에 넣으려는 찰나, 참관하고 있던 경찰관이 어지간한 사람은 까무러칠 발견을 한다. 이미 피부까지 검게 변한 B씨의 목울대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즉각 응급실로 옮겨진 B씨는 정상 맥박과 혈압을 되찾았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기적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사달이 난 것은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린 순간이었다. 그들은 다시 살아난 B씨를 버선발로 달려 나와 맞기는커녕 부양 의무가 없다며 신병 인수를 거부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B씨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부산의료원으로 옮겨졌다.

2. 연명의료결정법 전면 시행과 낙태법 개정 논란

청와대 누리집 국민청원 게시판에 23만이 넘는 참여자들이 낙태죄 폐지를 청원하고, 이어 11월 16일 정부 차원에서 인공임신중절 관련 실태조사와 더불어 법 개정의 필요성을 밝힘으로써 낙태 관련 논쟁이 본격화되는 시점이다. 내년 2월에 전면 시행되는 연명의료결정법과 더불어 생명윤리 분야의 첨예한 논쟁이 불 보듯 뻔한 형국이다.

사실 인공임신중절은 많은 사제들에게 다루기 힘든 주제다. 정서적으로 성에 관련된 문제를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해 하는 경우가 많고, 교회가 굳이 ‘이불 밑 사정’까지 간섭해야겠느냐는 시선도 한몫 한다. 아무리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외친다 한들, 당신들이 현실이나 알고 그러느냐는 비아냥거림을 당하기 십상이다. ‘고자 주제에!’라고 대놓고 꾸짖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있다. 게다가 인공임신중절과 안락사 문제가 세계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리트머스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걸림돌이 된다. 서구 사회에서는 인공임신중절과 안락사를 반대하는 것 자체로 케케묵은 보수로 몰리게 된 것이 이미 오래다.

이런 판국에 인공임신중절 문제를 차분히 토론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우선 태아의 생명권 대 산모의 자기 결정권이 대치하고 있고, 인공임신중절이 비윤리적이라 할지라도 과연 처벌이 능사인지를 묻는 또 다른 층위의 토론거리가 있다. 일견 과학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엄밀하게 규정할 수 없는 임신중절 가능 시점의 문제-과거 태아의 독자적 생존가능성(viability)을 기준으로 삼아 설정된 임신중절 가능 시점은 의학의 발달과 함께 계속 당겨지고 있다-가 있고, 민법상 상속의 자격을 가진 인격으로 취급받는 태아가 모자보건법 상에서는 그 인격성을 부정당하는 법적 일관성의 결여 같은 것들도 여기에 얽혀 있다. 모두가 치열한 토론과 공방을 감수해야 할 문제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23만이 넘는 사람들이 낙태죄 폐지를 청원했다. (이미지 출처 = Max Pixel)

3. 토론에 앞서

미래의 의료인을 대상으로 생명 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 토론들 안에 내포되어 있는 함의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의 한계 때문에 쉽지 않은 노릇이다. 교회의 공식 입장은 곧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를 통해서 명확히 주어지지 않을까 예상한다.

그런데 생명 윤리에 관련된 토론에 앞서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적 모습을 감안하자는 것이다. 앞서 두 가지의 사례를 소개한 것은 우리 사회가 생명의 영역에서까지 그 어떤 가치보다 경제적 요인을 앞세우는 현실을 보여 주는 극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생명윤리의 문제에 있어서 적어도 1973년 모자보건법의 탄생 이후로 생명보다는 경제를 앞세우는 데 익숙했다. 전 세계 30퍼센트 가량의 국가, 특히 북반구의 이른바 선진국 대부분에서 인공임신중절이 합법화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인공임신중절이 불법인 상황에서도 우리나라의 임신중절 수술은 그 비율과 숫자 모두에서 합법화 국가들을 멀찌감치 앞서고 있다. 임신중절의 이유에 있어서도 사회 경제적 이유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리하여 한때 아들 낳자고 연 3만 이상의 딸들을 중절수술로 없애 버린 결과는 어떠한가. 1985년에서 1995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의 남녀 성비는 무려 114:100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 뒷감당을 능히 해내고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임신된 태아들 중에서 30퍼센트를 웃도는 아이들(주요 선진국은 20퍼센트 이하)이 중절수술로 사라진다. 그중에서 합법적인 수술은 겨우 6퍼센트에 불과하다. 불법임을 알면서도 그 많은 수술을 해 버리는 의사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가? 산모의 결정권을 지켜주려는 양심적 동기 때문일까, 아니면 돈 때문일까? 돈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가족조차 팽개치는 현실에서 개인의 양심을 믿고 형법의 관련 조문들을 폐지하자는 주장은 과연 얼마나 현실적일 수 있을까? 돈 때문에 임신중절 수술을 집도하려는 의사를 그나마 멈칫하게 하는 것이 낙태죄를 통한 국가의 강제력이라면, 그 수단을 쓰는 것이 비윤리적인 것일까?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 이론’이나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 이론에만 그치고 마는 것은, 현실적으로 사회가 지극히 합리적인 의사소통행위자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이 작동하는 영역과 현실은 결코 일치할 수 없다. 낙태죄 토론에 앞서, 욕망과 힘의 논리에 얼룩진 우리 사회의 현실을 함께 성찰하기를 바란다.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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