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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로 오는 까닭제2차 바티칸공의회 뒤 예수회를 보라

(마이클 켈리)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아직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는 예수회 총장이던 페드로 아루페 신부(1965-83)다. 그는 당시 36살로 상당히 젊은 편이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신부(현 프란치스코 교황)를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1973-79)에 임명한 이다.

당시 베르골료 신부는 자신이 임명되자 “미쳤다”고 했지만, 아루페 신부는 이렇게 그를 지도자의 길에 들어서게 하고 또한 그의 상상력을 형성해 줬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의 직무 수행에 거의 날마다 반영되고 있다. 여기에는 그가 아시아에 중점을 두는 것도 포함된다.

베르골료 자신도 아루페 신부를 존경하는데, 로마에 있는 예수회의 큰 성당인 제수(예수) 성당에 있는 아루페 신부의 묘를 그가 자주 찾아가는 것에도 드러난다.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늘 잠시 멈춰 서서 기도하곤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기가 관구장에 임명되자 미쳤다고 한 것은 그가 이 자리에 필요한 경험이라곤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는 사회 전반뿐 아니라 예수회 자체도 갈등과 분열에 휩싸여 있던 때였다.

하지만 그는 여러 이유로 그 자리를 맡았다. 원래 그 자리를 맡을 것으로 기대됐던 후보자가 임기 시작을 약 반 년 앞두고 자동차 사고로 죽어서 마땅한 후보가 없었다. 젊은 예수회원들의 장상으로서 인기가 있는 이가 관구장이 되는 관례에도 맞았다.(베르골료는 수련장이었다) 또한 1976년의 군사쿠데타로 민주 질서가 무너지기에 이르는 당시의 사회, 정치적 갈등에 아르헨티나 예수회원들이 관여되어 그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난 상황이기도 했다.

아루페가 베르골료를 임명한 것은 아르헨티나 관구와 그 젊은 회원들의 희망을 착실히 실현할 만한 영적으로 성숙한 젊은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 관구는 분열해서 수십 명이 떠나가고 있었다. 베르골료는 임기 동안 아루페 총장과 긴밀한 관계였고, 오늘날 예수회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예수회 제32차 총회(1975)에도 참여했다. 이 총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뒤에 예수회원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현대 언어로 재규정했다.

(아르헨티나 관구에서) 이 새 정책이 실행되는 것을 아루페는 검증했고, 그에 따라 베르골료는 관구장 임기를 마친 뒤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 있는 예수회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된다. 그에 앞서, 관구장으로서, 베르골료는 군부독재 정권이 죽이려던 이들을 숨겨 줬다. 군부독재 정권은 1983년에 몰락하고 민주주의가 회복된다.

하지만 베르골료와 아루페의 인연은 이미 1960년대 초에 시작됐다. 아루페 신부는 예수회 총장이 되기 전에 일본 관구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아르헨티나 포함, 일본에서 예수회가 활동하기 위한 지원자와 자금을 모으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그때 베르골료는 일본에 갈 선교사로 자원했지만 건강이 안 좋아서 가지 못했다. 일본은 그의 마음에 소중한 나라로 남아 있다. 현재의 일본 관구장은 베르골료가 아르헨티나 관구장 시절에 선교 정신을 불어넣어 준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예수회의 초기 시절부터 아시아는 예수회원들의 상상 속에서 늘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인도에 갔던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문화적으로 적응주의를 실천했는데, 마테오 리치, 알렉상드르 드 로드, 그리고 로베르토 디 노빌리가 그들이다. 그들은 지금 위대한 예수회원의 성전에 들어 있으며, 예수회란 무엇인가 하고 궁금해 하는 그 뒤의 모든 예수회원들에게 기준점이 되어 있다. 지금 교황인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에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아루페와 그의 1960년대 고문들은 당시의 예수회원들은 너무 익어 있다고 믿었다. 성공은 뚜렷했고 회원 숫자도 넘쳤지만(아루페가 1965년에 총장이 됐을 때 회원 수는 3만 6000명이었다.) 예수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모든 수도회에 수행하도록 요청한 바에 맞추기 위해 봄맞이 대청소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 공의회는 수도회들에게 이미 얻은 명예나 성공에 안주하지 말고, 각자의 창립 정신을 재발견하고 교회의 쇄신을 위해 기여하라고 촉구했다.

아루페의 비전과 실천은 그가 안락한 자신의 고향 스페인을 떠나 “타자”인 일본을 향해 떠난 것처럼 영적이고 또한 세계 전체를 포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회의 영성 수련에 기초가 되는 이냐시오의 책 “영신수련”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여행을 갈 때 만나는 다른 종교와 문화권의 신비와 다양성을 포함해 모든 것을 체험하고 실천했다.

그는 또한 미국이 1945년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을 때 20세기를 규정하는 공포들 가운데 하나를 직접 체험했다. 당시 그는 일본 관구의 수련장이었으며 히로시마 교외에 살고 있었다. 그 자신은 의학 학위를 따기만 했을 뿐인 사람으로서, 방사선 재앙을 만난 이들을 돕기 위해 달려갔다.

1960년대는 또한 훗날 제3세계라 불리게 된 곳의 경제와 사회를 식민주의가 어떻게 망쳐 놓았는지를 유럽과 미국의 사람들-당시 교황들과 신학자들 포함-이 발견했던 때이기도 했다. 이 힘든 과제에 대한 대응으로, 교회의 사회적 교도권은 빠르게 발전했고, 예수회는 자신의 사명을 한 동전의 양면으로서 “신앙의 봉사와 정의의 촉진”으로 규정함으로써 이 과제에 참여했다.

어떤 예수회원들은 이 사명을 정치 참여로 축소시켰다. 베르골료는 가톨릭 이념을 포함해 모든 이데올로기를 평가함에 오랫동안 회의적이었으므로 이러한 축소를 지지하지 않았고, 그의 이러한 태도를 일부 예수회원들은 가난한 이들이 받는 학대를 살살 다룬다고 공격했다. 나중에 그가 한 일과 쓴 글을 보면 알 듯, 그가 그런 비난을 받을 근거는 전혀 없었다.

이러한 그의 과거를 잘 아는 예수회원이라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무슨 말을 하고 행동하든 놀랄 일이 전혀 하나도 없다. 특히 그가 보이는 선교사적 기질도 포함해서. “영신수련”과 예수회 제32차 총회, 그리고 예수회가 그 뒤로 겪은 역사에 익숙한 이라면 그 누구라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마음 안에서 울리는 소리에 자신의 심장이 메아리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50년간 많은 예수회원들이 걸어온 바로 그 신앙의 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한 열매인 것이다.

(마이클 켈리 신부는 예수회 소속이다. 현재 <아시아가톨릭뉴스> 대표이사이며, 타이에 있다.)

기사 원문: https://www.ucanews.com/news/what-brings-a-jesuit-pope-to-asia/80837

페드로 아루페 신부 (사진 출처 = 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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