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왜 걱정해? 하느님께서 하실 거야. 우린 그렇게 계속 살아 왔잖아!”

조금 머리가 크고, 나를 둘러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읽을 수 있게 된 뒤부터 저는 걱정, 근심이 한가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에 빠질 때가 많았거든요.

그 원인이 경제적일 때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일 때도 저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끝없는 걱정, 나쁜 머리로 고민하기, 겁먹고 좌절하기.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한마디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실 거야. 기도해. 모든 일은 걱정했던 것만큼 나쁘게 풀리지 않아.”

“엄마는 뭘 몰라서 그래. 이게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하느님이 뭘 하신다는 거야. 결국 현실에서 직접 해내야 하는 건 나라고!”

“그냥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은 하느님이 하신다는 거야. 왜 믿질 못하니?”

“믿어. 믿는다고. 하지만 믿는 건 믿는 거고. 잘 되어야 하는 건 잘 되어야 하는 거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아직 어린 나이에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믿고 맡기라니. 왠지 요행을 바라는 잘못된 기복 신앙을 말하는 것 같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도 어설프게 어른이 되어 갑니다. 과장되게 설정되어 있던 내 자신의 이상적 모습을 현실과 타협하며 수정해 나가다 보니 참으로 좌절스럽고, 원망스럽기까지 한 일도 생겼습니다. 그래도 안정적으로 살려면 어느 정도의 탈렌트를 받았어야 했거늘,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탈렌트의 양이 남들에 비해 적다고 느끼기 시작한 뒤로 기도 횟수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선물 받은 탈렌트가 얼마 없어 내 힘으로 다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하느님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지요.

어쩌면 내 믿음이 약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더 열심히 믿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이란 확신을 갖고 열심히 미사도 참석하고 기도에 매달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마도 제가 이해한 믿음이란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신 것과 조금 달랐던 모양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는 단순함이 필요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마태 25장 24-25절)

여행을 떠나는 주인에게 받은 탈렌트를 사용하는 세 명의 종 이야기를 담은 내용입니다. 불필요한 셈 없이 받은 것을 충실히 사용한 두 명과 달리,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고 셈한 탓에 오히려 벌을 받는 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와 깊은 믿음을 가졌던 두 명은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장 21절) 라며 칭찬을 받습니다. 결과에 대한 칭찬이 아닌, 믿음에 의한 성실함에 기뻐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마태 25장 16-17절)

칭찬 받기 위해, 결과를 훌륭히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아닙니다. ‘곧 가서 활용하여 더 벌었다.’ 그저 단순히 받은 것을 내어놓고 충실히 삶을 사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으시나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는 것, 그리고 결과는 그분께 맡기는 것. 그리고 그분께서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란 믿음. 이것은 그분에 대한 신뢰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제게 늘 말씀하시던 믿음은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몇 년 전 일이 떠오릅니다. 어느 여름, 수박을 자르고 있던 제게 조카 녀석이 달려와 큰 조각을 달라고 외칩니다. 떼쟁이 꼬마라 개중 가장 큰 것으로 골라 쥐어 줬음에도 더 큰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것이라 해도 믿지 않는 녀석을 번쩍 안아 올려 싱크대 위를 보여 주니 그제야 가진 것을 뺏길까 ‘이모 최고!’를 외치고는 바람과 같이 사라졌습니다.

“으이그, 이모가 어련히 제일 좋은 것 줬을까! 왜 이모를 못 믿니?” 라고 이야기하다 보니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러게나요.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실 텐데요. 늘, 어련히, 제일 좋은 것을 주실 텐데, 왜 그것을 못 믿고 매번 원망하고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걸까요.

우리에겐, 아니 저에게는 좀 더 단순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있는 상황에, 해야 하는 것에 단순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는 단순함. 그것이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사는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정말 욕심 없이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할 때, 하느님 안에서 내려놓을 수 있음을 좀 더 어렸을 때 알았더라면 수험생 시절이 그리 힘들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대학 입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수험생 분들, 임용 고시 등 여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어른 수험생 분들 모두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길 바라 봅니다.  

이지현 수녀(로사)
성심여고에 재직중이다. 
청소년에게 삶을 노래하며 행복하게 살도록 돕는 꿈을 꾸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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