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담긴 전례력을 따라 - 박유미]

그리스도 왕, 제대 모자이크, 독일 니 더작센 투이네 프란치스코 수녀원 성당. (이미지 제공 = 박유미)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누구를 따르겠느냐?"
새로이 오시는 주님을 향하는 마음 다짐, 신앙고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기쁨의 기름으로 축복하시여 영원한 사제이자 창조 전체의 왕이 되게 하시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그리고 평화를 위한 희생으로 그를 십자가 상에 바치셨나이다.  언젠가 모든 창조물이 그의 지배를 받게 되는 때 그는 아버지이신 당신께 영원하며 모든 것을 담은 진리와 생명의 왕국, 거룩함과 은총의 왕국,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왕국을 넘기시리이다. 그를 통해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들이 당신을 찬미하며 당신 영광에 찬미의 노래를 부르리이다“ - 그리스도 왕 대축일 감사송에서

살아가며 삶의 순간들을 매듭짓고 또 새로이 시작하는 시간들이 있다. 바쁘게 살아가는 중에도 한 번씩 삶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들이다. 어느 순간의 매듭만이 아니라 삶의 매듭을 짓는 이들, 삶의 매듭을 지은 이들과의 통공까지 돌아보게 하는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 그런 마음의 시간을 더 깊이 열어 준다. 특히나 선하고 치열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의 삶의 매듭을 대하게 되는 금년 이 시간은 그리스도 왕국을 이루어 가는 순례의 시간에 그리스도가 우리 순례의 목적지라는 그 의미를 더더욱 깊이 그리게 한다.  

그리스도 왕, 독일 슈바바하시 성당 제대. (사진 제공 = 박유미)

니케아공의회 1600주년을 기념하며 제정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그리스도교 박해시기가 지나고 집중적으로 제기되고 고민했던 신학적 문제들은 정리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는 니케아공의회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도록 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며, 세상 어느 권력에 매이지 않고 그리스도 왕의 모범과 규율을 따르도록 하는 신앙의 지침이 들어 있다. 

그러나 1925년 비오 11세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도입한 것은 니케아공의회 1600주년이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종전 7년 후, 유럽에서 거의 모든 왕정국가들이 종말을 고할 때 그리스도만이 진실한 왕국임을 선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왕의 주권에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들이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린다. 

중세에는 교황에게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이름이 주어진 반면 황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표현했다. 여러 종교에서 왕들은 동시에 사제였다. 그로써 초월성으로의 연결이 보장됐다. 20세기까지 왕의 권력이 신에게서 직접 파생된다고 보는 사고가 있었다. 국민들에게서가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왕직을 수행한다고 생각했다. 예수의 왕국은 원래 로마 황제에게 붙는 Kyrios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표현된다. 신과 같은 황제의 자리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세워진다. 그리고 지상과 천상, 세상 모든 것의 지배자(Pantpkrator)로 공경 받는다.

로마 프리실라 카타콤바, 3세기 후반. (이미지 제공 = 박유미)

초대 로마의 성당들에는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성화나 모자이크가 있었지만 다른 많은 성당에는 왕권을 이어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제대에 세워졌다.

'Domus', 주님의 집이라는 원래 의미처럼 성당에 들어서면 하느님의 집에 들어서는 것으로 사람들만이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성당 안의 성상들이 나타내 보이듯이 천상의 공동체와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함께하는 곳이다.

중세에 지어진 많은 성당들에는 최후의 심판, 재림하시는 주님을 천장그림으로 그려서 신자들 공동체가 그 아래를 통과하며 지나가도록 했다. 최후의 심판 후에 천상에서의 삶이 시작되므로 교회는 세상 지배의 궁궐이 아니라 그리스도 왕이 다스리시는 곳임을 나타낸다.

중세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묵상하기 시작한 시기였으므로 중세 때 그리스도 왕을 십자가상에 표현하기 시작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불리는 시기다. 이때에 십자가상의 예수를 눈을 뜨고 기도하는 이들을 바라보시는 왕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어떤 힘과 권력의 유혹도 물리치고 십자가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분의 삶의 길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왕 천장그림, 플로렌스, 1300년경. (사진 제공 = 박유미)

이런 신앙의 바탕 위에서 세계대전 뒤의 혼란기에 비오 11세가 제정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가톨릭 사회교리의 민주화에 길을 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만이 정당한 권위를 지니므로 지상 어느 권력자도 그리스도의 계명과 같은 권위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속화와 세속주의에 반대하고 절대자의 신정정치와 절대주의에도 반대하며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 순례의 최종 목적임을 더 깊이 인식하게 했다. 

축일 감사송의 내용처럼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리실 그분의 진리와 생명의 왕국, 거룩함과 은총의 왕국,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왕국'. 이 세상 왕국은 아니지만 이미 지금 여기에서 그 왕국이 시작되고 있음을 인식한다.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에 사로잡혀 봉사로 응답하는 곳에서. 그래서 더더욱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바탕에 그리스도의 계명을 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 왕은 규범을 강제하지 않지만 진리와 사랑을 하나로 일치시킨다.

실제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세속화의 흐름 안에서 교회가 박해를 받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당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며 이런 정신을 더더욱 깊이 심는 날이기도 했다. 독일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강림 다음 주, 오늘의 삼위일체 대축일을 신앙고백의 날로 정하고 유니폼을 입고 깃발을 들고 크게 신앙대회를 하며 세속 권력의 독재와 전체주의에 반대를 나타냈는데, 나치 정부가 이날을 '국민스포츠축제일'로 정하자 신앙고백의 날을 그리스도와 축일로 옮겨 그 의미를 새겼다. 

1933년 독일 에센, 그리스도 왕 대축일 행렬. (사진 제공 = 박유미)

비오 11세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축일로 제정했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전례개혁에 따라서 1969년에 대림절 전 주일, 교회력으로 일 년을 마무리하는 주일에 경축하게 되었다. 이 지상의 삶의 순례 안에서도 지상과 천상을 아우르는 그리스도 왕국 안에서의 통교를 되새기고 우리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그리게 된 것이다.

생명 보존과 평화에 대한 희망과 바램이, 정의와 사랑에 대한 움직임이 작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시간들에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새로운 힘과 희망을 불어넣는다.  창조의 세계, 우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소우주 인간의 작은 행동,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반드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힐데가르트의 일깨움처럼,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십자가를 지고 있는 우리 각자의 삶이  하나의 질문에 확고하게 답하며 나아간다면 변화는 이루어진다는 확신이다. 

한 해 전례력 마무리에 우리 각자의 삶에 응답하는 자세를 묻는 이의 성찰을 내게도 던진다.    
 

로마네스크 양식 십자가, 이탈리아 남티롤 인니헨 성당. (사진 제공 = 박유미)

그리스도 왕 대축일 아침

세 개의 십자가/ 왕이신 당신은 / 가운데/ 그리고 왼쪽에 하나/ 또 오른쪽에 하나.
그 중 하나 모욕하기를/ "너 자신을 도와 봐라"/ 허나 다른 하난 청하기를/ "나를 기억해 주소서"

세 개의 십자가/ 십자가에 매달린 세 사람/
왼쪽 사람 나를 바라보며/ "그를 믿지 말아라/ 어리석은 자 저기 달려 있다“
오른쪽 사람 나를 바라보며/ "그를 믿으라,/ 그의 왕국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 나를 바라보시며/ "결정하여라,
왼쪽을 따를 것인지 오른쪽을 따를 것인지/ 죽음을 택할 것인지 생명을 택할 것인지.
네게 나는 누구인가?/ 어리석은 자인가?/ 아니면/ 왕인가?“

힐데가르트 니스

박유미 프리랜서(수산나)
서강대 사회학과, 독일 본, Friedrich-Wilhelm-Uni. 종교사회학 전공, 가톨릭사회론 제1 부전공,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에 대한 시대별 반향으로 본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 연구'. 학문과 일상생활, 교회 안의 신앙생활과 일상의 간격에 다리를 잇는 교육과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이 있으며 전례력과 성인들의 가르침에 담긴 사회적 배경 인식과 성찰을 통해서 사회교리의 보편성과 사회영성 일상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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