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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말랭이가 가르쳐 준 것[부엌데기 밥상 통신 - 49]

해남에 사는 지인이 자연물로 드림캐처 만드는 수업을 연다고 해서 꼭 가고 싶었다. 한데, 날은 춥고 해는 짧고 신랑은 그 먼 데까지 뭣하러 가느냐며 핀잔이나 준다. '치, 할 수 없지. 그럼 나 혼자 애 셋을 다 데리고 가 보는 거지 뭐.' 이렇게 마음을 먹고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궁리를 해 본다. '버스정류장까진 택시로 움직인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는데 두 번 갈아타야 하니까 각각 세 번씩, 도합 여섯 번은 버스를 타고 내리고 해야 한다. 다울이는 알아서 잘할 것이고 다랑이는 내가 도와줘야 하는데, 다나를 안고 다랑이를 차에 올리고 내리고 하기가 쉽지가 않네. 다울이가 도와줄 수 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버스카드를 찍거나 버스표를 내려면 내 손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럼 다나를 포대기로 업어야 하나? 그래, 업고 가는 걸로 하자. 근데 만약 중간중간 다나가 똥을 싸는 돌발상황이 발생해서 기저귀를 갈아야 한다면? 다른 아이들이 급하게 화장실에 가고 싶어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아, 그렇게 되면 &%^#@@*&....!!!'

결국 눈물을 머금고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나 혼자 애 셋을 데리고 집을 나서려던 계획 포기!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서 왜 사슴이 애 셋을 낳을 때까진 선녀에게 날개옷을 내어 주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다. 둘만 되어도 어떻게든 해 보겠는데 셋을 다 달고 움직이는 건 너무, 너~무 어렵다. 조금 부풀려서 비유하면 양쪽 발에 모래 주머니를 하나씩 달고, 머리엔 항아리 하나를 이고 산 고개를 넘어가는 것 같다고나 할까? 적어도 다나가 지금보다 똥 누는 횟수가 줄거나 기저귀를 떼거나 할 때까지는 말이다.

할 수 없이 날개옷을 도로 접어 넣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는데, 신랑이 내게 말했다.

"안 갈 거죠? 그럼 밭에서 무 뽑아 올게요."

'지금 이 상황에 무라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상황에서 외출이라니!'가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무 뽑아 갈무리해야지, 김장 해야지, 메주 쒀야지, 콩이나 팥도 다 추려야지... 남아 있는 일감도 첩첩산중이니 말이다. 더구나 12월 초에 서울 친정나들이를 계획하고 있는데 그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하려면 내가 지금 날개옷이나 쳐다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신랑이 번개처럼 밭에서 뽑아 온 무 두 포대를 부엌 바닥에 쏟아 부었다. 어마어마한 양이라 입이 쩍 벌어진다. 지난번에 한 차례 뽑아서 작업을 했는데 아직도 이렇게나 많다니... 올해는 뭣이든지 풍년이지만 그 가운데 제일은 무다, 무! 도저히 나 혼자 어쩌지 못할 양이라 지난번에도 온 가족이 달려들어 공동작업을 했다. 이번에도 결국 다 불러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다울아, 다랑아, 와라. 무 작업하자!"

신나게 놀고 있던 아이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모여들었다. (한때는 왜 해야 하느냐며 반발을 하기도 했지만 사람은 모름지기 밥값을 해야 한다는 나의 밥값론에 다들 세뇌당하고 말았다.) 그러고는 손발 척척 맞춰 가면서 무 작업에 빠져든다. 작은 크기의 무는 이파리째 그대로 큰 바구니에(김치 담글 용도), 큰 무는 무청(시래기용) 따로 무(무말랭이용) 따로 해서 각기 다른 포대에, 시들거나 누렇게 된 이파리는 닭 모이용으로 또 다른 포대에... 그렇게 일하다가 다울이는 즉흥적으로 일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몇 개 남았냐, 당당 멀었다! 몇 개 남았냐, 나도 모른다! 몇 개 남았냐, 두 개 남았다...."

"야, 노래도 좋지만 노래할 때도 손을 쉬지는 말아라. 일 노래는 일하다가 멈추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야."

"알아. 나도 노래 부르면서 일하고 있다구!!!"

"엄마, 형아, 지금 다나가 무 이파리 갈기갈기 찢고 있어!"

아이들과 공동작업을 하니 언제나처럼 시끌법적 요란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생동감과 활기가 넘쳐 별거 아닌 일에도 웃음꽃이 피고, 그러는 사이 순식간에 일이 끝나 있다. 사람 손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고사리손 아이들 손도 이렇게 무섭다니.... 아이들은 무를 만졌더니 손이 시렵다면서 손을 비비고 있었는데 그 손들이 얼마나 귀엽고 예쁘던지!

문득 내 손을 봤다. 날이 추워지면서 급격히 거칠어지고 쭈글쭈글해진 내 손.... 내 손도 한때는 탱글탱글 팽팽했으나 어느새 이렇게 되었다. 손에 물 마를 새 없이 살림하느라,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을 먹여 살리느라.... 어디 손만 그런가. 흰머리는 점점 늘어 가고, 얼굴은 까칠하다. 겉모습만 봐서는 나는 지금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 거다. 날개옷엔 곰팡이가 피고, 선녀는 선녀였다는 기억마저도 희미해진 상태로 초라한 얼굴빛이 되고....

그럼에도 나는 날고 있다고 느낀다. 날개옷이 없어도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노래하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왜 그럴까? 한참을 고민했는데 얼마 전에 아이들과 작업해서 뚝뚝 썰어 말려 놓은 무말랭이가 달큰한 냄새를 풍기며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너나 나나 같은 신세야. 헛된 것은 남김 없이 다 주어 버리고, 점점 쭈글쭈글해지지. 그래야 진짜 달디단 다른 차원의 맛을 품게 되거든." 그런다. 그 얘길 듣고 무말랭이를 하나 먹어 봤더니, 과연 달디달다. 매운 맛은 어디로 갔는지, 아삭한 맛은 어디로 갔는지 아쉽기도 하지만 무말랭이는 그 자체로 맛의 도약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았다. 맛뿐 아니라 식감도 달라지고 성분도 달라졌겠지. 무는 무이로되 무 아닌 다른 것이 되었겠지.

나도 그러고 있다는 걸 아니까, 내가 날개옷 없이도 날 수 있는 거다.

무생채, 무나물, 시래깃국, 무김치.... 무만 있어도 넉넉한 밥상!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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