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춧돌 틈새에 핀 풀꽃

▲ 바람에 결에 실려온 물기로 흙 한줌 없는 주춧돌 틈새에 핀 풀꽃, 들녘에서 흔히 볼수 없는 꽃이다.

한 달 하고도 보름은 더 됐을 것입니다. 주춧돌 틈새에 풀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흙 한줌은 물론이고 물기조차 없어 보이는 곳에서 녀석이 살아날 수 있을까?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어느 날 녀석은 보란 듯이 꽃을 피워 냈습니다.

"애들아 저 꽃 이름이 뭐냐?"
"뭔디?"
"저기 주춧돌 아래 핀 꽃 몰랐냐?"
"알긴 알았는디, 어? 진짜 꽃이 폈네"


우리 집 아이들은 그냥 거기에 풀 한포기가 자라고 있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매일 보는 식구들의 얼굴처럼 구태여 관심 쏟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그렇게 집 주변이 온통 풀꽃들이다 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거 제비꽃 아녀?"
"비슷하게 생겼는디, 아닐껄"


제비꽃처럼 생겼는데 제비꽃은 아니듯 싶습니다. 제비꽃 사촌쯤 돼 보입니다. 하지만 들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풀꽃은 아닙니다.

"아빠 그람 저 꽃 이름이 뭐여?"
"글세? 나도 잘 모르겠는디. 니가 한번 식물도감 같은 거 찾아봐봐, 아냐 그냥 내비 둬라. 그냥 보면 되지 뭐."

식물도감을 찾아보면 그 이름을 알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녀석을 이름 속에 가둬 놓을 것만 같았습니다. 꽃말이니 뭐니 하는 개념 속에 갇히게 될 것 같았습니다. 녀석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언제나 웃으며 다가오니까요.

그렇게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꽃이 질 때가 됐을 텐데 싶어 유심히 보았더니 장 그대로 웃고 있습니다. 또 다른 녀석이 피었습니다. 부엌으로 들어서는 또 다른 주춧돌 틈새에 뿌리 내린 녀석입니다. 녀석은 어렸을 때 늘 보아왔던 녀석입니다. 그 이름은 기억나질 않지만 뜰팡 틈새 혹은 담벼락 틈새에서 꽃을 피우곤 했던 녀석입니다. 시계 꽃잎처럼 생긴 그 잎을 따 먹기도 했습니다. 그 잎을 씹으면 아주 시큼시큼했던 기억납니다.

▲ 어렸을때 잎을 따서 먹었던 풀꽃, 그 맛이 시큼시큼하다.

녀석들은 우리식구가 모르는 사이에 피고 지고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꽃 피운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도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웃고 있습니다.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물기 하나 없어 보이는 처마 밑 주춧돌 틈새에서 어떻게 뿌리 내린 것일까? 아무리 봐도 참 신기하고 신기하기만 합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3천년에 한 번 핀다는 꽃, 우담바라. 그 꽃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도리가 없지만 녀석들과 마주대하고 있으면 우담바라와 다름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잔머리 굴려 주춧돌 틈새에 뿌리내린 신비한 풀꽃을 통해 우담바라를 상상해 봅니다.

여래(부처의 여러 칭호 가운데 하나)가 태어날 때나 전륜성왕(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세계의 통치자를 지칭하는)이 나타날 때에만 그 복덕으로 핀다는 우담바라 꽃,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주춧돌에 핀 풀꽃은 부처입니다. 보고만 있어도 맘이 참 편하기 때문입니다. 마주 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내 온 마음을 통치하는 전륜성왕입니다.

아내와 한바탕 신경전을 벌이다가 화 기운을 추스르지 못해 버럭버럭 마루에 걸터앉아 있다가도 웃고 있는 녀석을 보게 되면 아내에 대한 미움이 조금씩 녹아내립니다. 녀석들의 미소는 화 기운을 물처럼 가라앉혀 주곤 합니다.

아내는 뜰팡에 쪼그려 앉아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루 주변을 서성거리는 바람 곁에 한마디 흘립니다.

"어디서 온 것일까······"

녀석들이 뿌리 내린 곳을 아무리 살펴봐도 흙 한 줌 보이지 않습니다. 한 줌의 먼지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도시를 오가며 정신 놓고 밥벌이에 목을 맬 때는 녀석을 까마득히 잊곤 합니다. 하지만 설렁설렁 논밭일 하고 돌아올 무렵이면 녀석들과 만나게 됩니다. 개울물에 흙발 씻겨 고무신 탈탈 털어 주춧돌 옆댕이에 세워 놓다가 녀석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습니다.

▲ 주춧돌 틈새에 핀 풀꽃의 미소는 고개 숙이지 않으면 볼수 없다.

꽃이 피기 시작하고부터 한 달이 넘게 지났는데도 녀석들은 미소를 거두지 않습니다. 어둠 속, 마루에 켜 놓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도 꽃을 피웁니다. 하루 이틀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미소를 내보입니다.

손님들이 찾아오면 푼수처럼 녀석들 자랑을 늘어놓곤 합니다.

"이쁘쥬?" "신기하쥬?" "어디서 온 것일까유?"

문득 처마 밑 그것도 물기 없는 주춧돌에서 녀석들은 뭘 먹고 살까? 생각하다가 그동안 단 한차례도 물을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께 물 한 번 준 적이 없었네요."

최은숙 선생과 함께 서툰 낫질로 벼 벨 때도 도와주고 못자리 놓을 때도 일손 보탰던 김영희 선생이 그럽습니다.

"그냥 두는 게 좋겠네요. 물 주지 않아도 꽃 피운 이유가 있겠죠."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습니다. 녀석들은 그동안 단 한번도 목마르다며 물 좀 달라 애원한 적이 없습니다. 물 한 번 준 적이 없지만 잎이나 꽃이 말라 시들시들 앓거나 하질 않았습니다. 녀석은 어쩌다 바람 곁에 실려 온 물기만으로도 충분히 생명을 유지하고 변함없이 꽃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살이들은 자신이 감당할 만큼의 생명력을 갖고 태어납니다. 주춧돌 틈새는 녀석들이 생명살이를 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환경조건일 수 있습니다. 녀석들이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녀석들은 적지도 많지도 않게 딱 만큼 한 것으로 살아갑니다. 적거나 많거나 하는 개념은 사람의 손길 닿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주춧돌 틈새는 사람이 생각할 때 가장 '열악한 환경'이라 할 수 있겠지만 녀석들에게는 최상의 환경 조건일 수 있습니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사람의 손길 없이 한 달 내내 싱싱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입증해 주고 있으니까요.

녀석들이 미소 짓고 살아가는 '주춧돌 환경'을 바꿔 놓는다면 녀석들에게는 그 어떤 고난이 찾아 올 것입니다. 물 한 모금 먹을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라 함부로 판단하여 물을 주게 되면 너무 과해 일찌감치 시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물고문이 되었거나 주춧돌 틈새에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그 어떤 영양분이 쓸려나가 생명살이에 큰 부작용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아주 작은 생명체도 그러한데 하물며 대운하를 건설하려는 속종을 감추고 멀쩡한 강을 정비 하겠다니, 얼마나 정신나간 짓거리인가 싶습니다. 좀더 배불리 먹겠다는 것이겠지요. 산하를 까뭉게 먹고 또 먹고, 얼마나 더 먹어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풀꽃들은 내게 이릅니다. 당신이 먹고 또 먹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상 저들의 미친 짓거리는 계속될 것이다. 아귀 같은 저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과의 싸움이다. 저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먼저 당신 자신부터 더 먹겠다는 아귀근성을 내려놓아라 이릅니다.

▲ 따로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두 달이 다 되도록 시들지 않은 풀꽃, 더 많은 꽃을 피우고 있다. 

비록 손바닥만한 논밭이지만 흙을 만지다 보면 문득 문득 하루 세 끼 배 채우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질이 넘쳐나는 이 풍족한 세상에서 하루 세끼 먹기가 뭐 그리 힘드냐 하겠지요.

하지만 하늘과 땅의 순리대로 살아간다면 과연 하루 세끼 먹는 게 쉬운 일일까요? 하루 두 끼를 먹게 되면 배가 고픕니다. 힘이 듭니다. 하지만 하루 두 끼 먹는 날 보다는 세 끼 이상을 먹고 사는 날이 더 많습니다.

하루 세 끼를 먹고도 뭔가를 더 먹게 됩니다. 담배 피우고 술을 마시거나 뭔가 군것질을 하게 됩니다. 자연을 쥐어짜거나 훼손한 결과물로 그 뭔가를 섭취하게 됩니다. 좀 더 많이 먹는 만큼 동물이든 사람이든 누군가가 그 만큼 굶주리고 고통 받아야 하고 내 자신 또한 온전치 못합니다. 몸이든 정신이든 부대끼게 됩니다. 너와 나 모두가 고통의 바다에서 신음해야 합니다.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는 주춧돌 틈새의 풀꽃은 참 편안해 보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녀석들은 내가 고개 숙여 낮은 자세로 바라볼 때만 미소를 건네줍니다. 내가 고개 빳빳이 쳐들면 녀석의 미소를 볼 수 없습니다.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 상처가 날 정도로 녀석들은 약 하디 약해 보입니다. 하지만 녀석들은 최소한의 환경 속에서도 미소 지을 만큼 강합니다. 나는 녀석들에게 큰 상처를 낼 만큼 강해보이지만 녀석들처럼 최소한의 환경 속에서 버텨내지 못합니다. 녀석들보다 강한 게 아니라 단지 독할 뿐입니다. 딱 먹을 만큼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독을 만들어 내고 그 독기로 자신은 물론이고 누군가를 아프게 합니다. 세상을 아프게 합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송성영 /1960년 대전에서 태어난 송성영은 대학 졸업 후 한동안 도(道)를 공부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산 생활을 하기도 하고 잡지사 일을 하기도 했다. 돈 버느라 행복할 시간이 없던 그는 덜 벌고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에 고단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 생활을 전혀 모르는 아내와 갓난쟁이 아이 둘과 함께 계룡산 갑사 부근의 시골 마을로 내려간다.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옆으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널찍한 마당이 있는 빈 농가를 200만 원에 구입해서..  
시골에서 생활한 지 10년 넘었고, 두 아들 인효와 인상이는 대나무 숲에서 아빠에게 경당도 배우고, 개울에서 가재를 잡고, 마당에 그림을 그리며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미술을 전공한 아내는 외양간을 개조한 화실에서 그림도 그리고 시골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다. 송성영은 텃밭을 일구며 틈틈이 다큐멘터리 방송원고를 쓰며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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