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용산로 4가 유송옥 씨, "이곳은 비참하지만 축복 받은 땅"
용산 남일당 건물앞 참사 현장에 가면 늘 마주치게 되는 얼굴들이 있다. 물론 문정현 신부와 이강서 신부는 매일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이 금방 알아볼 수 있지만, 그밖에도 아예 이곳에 살다시피하며 주변을 돌보는 봉사자들도 있다. 미사 도우미도 하고, 일이 생길 때마다 손발이 닳도록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다. 범대위 사람들도 있고, 전철연과 유가족들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전국철거민연합 소속의 유송옥 씨(43세)는 유가족들을 대신해서 이곳 분향소를 돌보고 사람들이 방문하면 안내자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유송옥(마리아). 그는 남해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통영으로 나와 군청에서 일하다가 몸이 아파서 쉬러간 충북 제천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당시 교통사고로 장애를 안고 있었고, 8살이나 차이가 나는 그 사람과 결혼하는 걸 친정에선 당연히 반대했다. 본래 고집이 센 탓일까, 아님 사랑이 너무 깊은 탓일까. 본래 연민이 많은 탓일까, 그는 집안의 반대에도 그와 결혼했다. 식구들도 몇 명 참석하지 않은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제천에서 자녀를 둘이나 낳도록 가게를 열어 장사를 해보았지만 결국 자리잡고 못하고, 큰아이 초등학교 3학년 때 빈털털이로 서울에 올라왔다. 처음엔 용산 신계동에서 시동생이 마련해 준 보증금으로 치킨집을 열었다. 가게에서 먹고 자고 몇 년을 버티면서 자리를 잡을만하니 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나중에 용산로3가 지역으로 옮겨와 24시간 편의점을 열었다. 이번엔 시누이가 뒷돈을 대줬다. 남편과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빚을 거의 다 갚을 즈음에 재개발 공지가 난 것이다.
조합측과 건물주는 보증금은 아랑곳 없이 돈 몇 푼 쥐어주고 나가라 했다. 그러나 내내 삶에 밀려다닌 송옥씨로서는 더 물러 설 곳이 없었다. 처음엔 이렇게 버틸 생각이 없었다. 경험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 아빠가 철거반대투쟁을 하겠다고 나서서 부부싸움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다 다치면 자기만 손해 아닌가. 결국 송옥씨가 전철연 의장도 만나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본 뒤에 아이들 아빠 대신에 이 일을 떠맡기로 했다. 이 일에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용산에서 전철연 일을 시작하면서 수원의 천천으로, 서울 남가좌동으로, 용산로 5가동으로 철거투쟁으로 정신없는 곳에 연대투쟁하러 다녔다. 그래서 이런 주거투쟁 가운데 성과도 보았다. 그들은 임대아파트도 받고 피해보상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송옥 씨가 살고 있던 용산로 4가 투쟁은 더 힘겨웠다. 용역들이 막무가내로 건물에 펜스를 치고 부수기 시작했다. 급기야 1월 19일 전철연 식구들은 남일당 건물에 망루가 세워서 올라갔지만, 그들은 화염에 휩싸인 채 시신으로 건물을 내려와야 했다.
송옥씨는 사고가 나기 바로 이틀 전에 모래내시장에서 이들과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 안주가 맛있어 다음에 여기 또 오자고 입을 모왔는데, 다시는 더불어 술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영안실에 누워 있는 것이다. "경찰이 용역들과 합동작전으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한다.
남아 있는 유족들을 보면서 "이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국민들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정부와 경찰은 철거민들이 자살한 것이라고 몰아붙이지만 그것은 거짓이라고 송옥 씨는 잘라 말한다. "진실은 철거민들이 왜 망루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뭔가 말을 하고 싶었고, 그렇게 해야 그나마 말을 전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 응답은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송옥 씨는 용산참사 투쟁을 접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거였다. 지금 구치소에 갇혀 있는 전철연 회원들은 생각하며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일 수 있겠느냐?"며 되물었다. 그들은 테러리스트로 몰려 있고 자살했다는데, 그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용산 4구역 안에선 당시에 경찰을 도와 물대포를 쏘던 용역들이 활보하고 다닌다. 일을 맡았던 현암건설 과장은 벌금을 백만 원인가 백이십만 원인가 내고 풀려나와 옛일인듯 골목을 누비는 것을 보면서, 송옥 씨는 심정이 상한다.
"법이란 게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데, 절대 그렇지 않더군요. 없는 사람은 구치소 가고, 돈 있는 사람들은 잘못 저지르고도 얼마든지 활개 칠 수 있는 게 법이죠. 그게 힘들어요. 억울하잖아요. 그게 이 나라 꼴이잖아요. 경찰도 우리가 연락하면 30-40분 걸려야 오는데, 철거업체에서 연락하면 2-3분이면 달려옵니다. 이게 뭡니까? 한번은 용역이 철거민을 때려서 경찰을 불렀더니, 달려온 경찰에게 용역업체 직원이 '이 놈들 잡아!'하니 경찰이 오히려 저희를 잡으러 오더라구요. 경찰이 시민이 아니라 용역 말을 듣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란지 묻고 싶어요."
그래도 송옥 씨는 경찰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명령체계 안에서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으로서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심하게 할 필요는 없을 텐데, 하고 안타까와 했다. 경찰이 유족들을 밀치고 욕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송옥 씨가 여전히 마음 아픈 것은 아직 장례도 못 치른 희생자들 때문이다. 겨울에 물대포 맞아가며 망루 안에서 얼마나 추웠을까! 그런데 지금도 그들은 병원의 차가운 냉동실에 누워 있다는 게 가슴을 치는 것이다. 그래서 바란다. 하루속히 진실이 밝혀지고 명예회복되어 이들을 따뜻한 땅에 묻고 싶다는 거다. 그 위에 그렇게 맛있게 마시는 소주 한 잔 부어주고 싶다는 거다.
아픔 속에서도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지난 3월 28일 경에 용산에 오셨던 문정현 신부였다. 그후로 지금껏 매일 미사를 해주고 있다. 이강서 신부도 사제피정 끝내고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남아 함께 하고 있다. 송옥 씨는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하느님이 우리한테 보내주신 분들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송옥 씨는 가톨릭 신자지만, 지난 10동안 성당에 다니지 않았다. 교회에서 말하는 냉담자였다. 그런데 문정현 신부가 사정을 듣고 성체를 모셔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동안 지은 죄가 많은 것 같아 첫날 영성체를 하지 않았다. 문 신부가 재차 "왜 영성체 안 하냐?"고 물으시며 고해성사를 해주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성체를 모셨는데 눈물이 마구 나더라고 말한다.
그후로 송옥 씨는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무섭고 두려워하던 마음도 사라진 것 같다. "하느님께서 제 곁에 계신 것 같고, 두 분 신부님이 계셔서 든든하다"고 말한다. 송옥 씨는 언젠가 이강서 신부가 미사 강론에서 한 말을 새겨 듣는다. "악을 악으로 대하면 나도 악인이 된다. 상대방이 악하게 대해도 내가 착하게 대하면 나는 천사가 된다"는 말이다.
그후로 경찰과 싸우면서도 "그래, 너도 본시 얼마나 착한 사람이냐..."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고, 그러면 내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한다.
지난 5월 3일 김운회 주교가 용산 참사 현장을 다녀간 뒤로 더 기운을 얻었다. 사람들은 남일당 건물을 두고 남일당 성당이라 부른다.
"생각해 보면, 이곳이 정말 축복받은 땅이란 생각이 들어요. 예전엔 왜 이리 힘들지, 억울하게 생각했는데...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간간이 동료들과 차를 마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신부님과 주교님들이 기도를 더 많이 하셔서 문제가 해결되고 장례 치러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송옥 씨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시민들이 찾아와 음료수 한 캔 건네주고, 멸치 볶음 한 그릇 가져다 주면 힘이 나고, 나도 저 사람들처럼 마음이 우러나 남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솟아 오른다. 그래서 투쟁이 끝나면, "내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해 주고 싶다"고 말한다. 마흔 세 해를 살면서 집과 가족들 생각만 하고 정신 없이 살았다. 사람이 그만큼 고단했던 탓일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가장 미안하다.
그 때가 되면, 문정현 신부나 이강서 신부처럼 내 자식과 가정을 넘어서 다른 이웃들에게 열정을 쏟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도 여기에 줄곧 있으면서 집에도 가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그래서 가족들한테 늘 미안하지만, 마음을 더 넓게 가져야 한다고 다짐한다.
송옥 씨는 그 비참한 현장에서도 "세상은 살아볼 만 하다"고 느낀다고 한다. "상황은 변한 게 없지만 여기 있으면서 내가 변했다"고 고백한다. 남일당 건물, 이 용산로 4가에서 만난 사람들, 사제들과 가톨릭 신자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남의 일에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찾아와 주고, 격려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새록 새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