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노무현을 만나러 용산으로 가야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전 국민의 추모는 끊이지 않는다. 왜 이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대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분들이 그 이유에 대해 짐작해 보았지만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추모를 넘어서서 분노를 표출하는 분들도 많다. 추모행사를 막는 정권에 대한 분노,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사지로 몰아넣은 검찰과 현 정권에 대한 분노, 시민 광장을 봉쇄한 경찰력과 정권의 그 옹졸함에 대한 분노 사람들 가슴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그런 분노들이 가득 담겨 있음을 추모장소에 갈 때마다 느낀다. 또한 그 슬픔 역시 처연하다.


정치권에서 보자면, 아니 그 뿐 아니라 여러 운동단체나 시민단체에서 보자면 이 시민들의 분노와 슬픔이 값어치 있게 살아나야 한다고 볼 것이고 그를 위한 궁리에 골몰할 것이다. 민주당 등의 야당은 제각기 조금씩은 다르나 현 정권을 향한 공격의 실마리로 사용하는 것은 대등소이하다. 이 열기가 식기 전에 무엇이든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을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러한 생각은 나쁜 것이 아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이러한 국민들의 요청은 가시적인 결과가 나와야만 한다.


그럼에도 무척 씁쓸하다. 왜 국민들은, 아니 우리들은 이 슬픔과 분노가 노무현이라는 전 대통령 한 분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조금 심하게 말하여 몇몇은 이런 말들을 하곤 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나고 그 것이 무슨 일이었는지 도대체 그 참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지기 전에 김수환 추기경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모든 국민들의 시선은 명동으로 향했다. 40만이 넘는 시민들이 추모대열에 섰으며 국민 누구를 막론하지 않고 안타까워했다.


용산 참사와 더불어 화물노조 박종태 지부장의 죽음이 알려지던 때, 그의 죽음이 바로 이 사회의 질곡 같은 암흑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던 그 때 노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셨다. 500만이라는 국민의 그분을 추모했고 그 열기는 지금도 식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용산도 고 박종태 지부장도 잊혀지고 말았다. 그렇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야박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다. 왜 그 많은 국민들의 시선은 용산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토록 민주주의의 퇴행을 분노하던 국민들이 왜 용산의 참사에 대해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일까? 생존의 문제에 부딪혀 온 몸이 재가 되어버린 이 참사는 그 분 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많은 추모 글귀를 기억한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그 뜻을 이어받겠다고 했다. 그토록 추구했던 사람 사는 세상을 대신 만들겠다고 했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했다. 우리에게 맡기고 편히 가시라고 했다.


더욱 야박하게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갖은 이론과 갖은 정보가 아닌 듯 하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조직과 힘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역사를 되돌려 나갈 그 길에 부족한 것은 우리의 슬픔과 분노가 아닐 것이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진실한 연민과 자신의 헌신이다. 노무현으로 상징되고 있는 그 “민주주의”와 “사람 사는 세상”은 용산 참사와 박종태의 처참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그에 대한 헌신을 통해 현실이 된다. 


그것이었을 것이다. 이 정부가 두려워하는 것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가 현실에서 용산 참사의 추모로 이어지는 것.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뿐 아니라 용산의 죽음에도 분노하는 것. 봉하 마을과 대한문에서의 그 슬픔과 분노가 용산 추모의 현장에서 살아나는 것.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그 희망이 도시 빈민과 약자, 비정규직과 소수자, 빈곤층에 대한 연민과 분노로 현실화 되는 것.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무현이 현실에서 살아나는 것, 그가 정치를 재개하는 것일 터이다.


대한문에서 밤을 지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말해보았다. 이제 용산으로 가자고. 내가 무슨 답을 들었을까? 우리는 무슨 답을 내놓을 것인가. 부활한 예수가 묻는다. 나를 찾고 있느냐고. 갈릴리로 오라고 말이다. 그 척박한 가난의 땅으로 오라고 말이다.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