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숙의 여행(女幸), 여행(旅行)-2] 김유정 문학관 가는길

하늘은 알았고, 땅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수풀 속에서 생명을 나누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뻗어난 나무들이 바람이 전해준 소식으로 알게 됐고, 화들짝 놀란 잎새들은 저마다의 수다로 아픈 소식을 전하고, 또 전하며 슬픔을 나눴을지도 모른다.

나는 몰랐다. 그날 아침 청량리 역을 떠나는 경춘선 열차에 몸을 싣고 김유정역에 닿을 때까지. 김유정 역에서 김유정 문학관으로 걸어가 작품 속에 녹아 있는 김유정의 숨결을 느끼며 내 생각의 뜰 안으로 깊이 들어갈 때까지도 몰랐다. 죽음 뒤에도 남는 이름의 향기를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아침, 기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 대부분 새벽에 집을 나섰을 것이고, 따라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모른 채 조금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 여행에 들떠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말의 레저를 위해 더러는 배낭을 메고, 더러는 여행 가방을 들고 즐거운 표정으로 청량리발 남춘천행 열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청춘남녀들이, 가족단위로, 또는 단체가 섞인 열차 안은 후끈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새벽이 걷히고 아침이 열렸지만 여행객을 반기는 것은 햇살보다 안개비에 촉촉이 젖은 대지의 그림자였다. 달리는 열차를 따라 거꾸로 흐르는 강물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오른다. 비는 조금씩 내렸다 그쳤다하면서 줄곧 기차를 따라온다.

여행객들은 날씨에 개의치 않은듯 했다. 가는 빗줄기가 차창을 뿌리쳐도, 잠시 햇살이 돋아 창을 스쳐도 그저 길떠난 기쁨에 젖어 일행들과 어우러지는듯 했다. 일상은 언제나 무심하게 흘러간다.

대성리역, 청평역, 강촌역 등에서 무리지은 등산객들과 여행객들이 내렸다. 단선 철도인 관계로 상행인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차를 탄 채 플랫홈에 머물러 기다리기도 했다. 예전에 자주 탔던 완행열차가 생각났다. 이름모를 역에 정차해 하염없이 기다리던 일, 열차 속에서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사먹던 일, 그리고 짦은 정차 시간에 쫒기며 우동을 먹으며 뜨거운 국물을 후르륵 마시던 일......그런 풍경들은 사라진 지 오래됐다. 살면서 경험한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소멸됐다. 살아온 날들의 기억조차 희미해지고 의식에서 사라졌다. 소멸되는 것은 죽음인가? 죽음으로써 소멸되는 것인가?

요절한 소설가와 죽음을 택한 前 대통령을 묵상하다

2009년 5월23일 토요일. 새벽에 집을 나서 김유정 문학관으로 가는 길에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그는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 8남매 중 막내로 1908년 태어난 김유정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독과 빈곤 속에서 우울하게 자랐다고 한다.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1929년 고향 춘천시 신동면 실레마을로 돌아왔다.

1930년 늑막염을 앓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병마에 시달렸다. 한때 금광에 손대기도 하고 들병이들과 어울려 무질서한 생활을 보내기도 했던 그는 1932년 마음을 고쳐잡고 실레 마을에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세워 불우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935년 '구인회'에 가담해 김문집·이상 등과 사귀었다. 1935~37년까지 2년 동안 단편 30여 편과 장편 1편(미완), 번역소설 1편을 남겼다.

결핵과 늑막염이 그의 사인이었다. 스물아홉해 짧은 세월 이승에 머물면서 그가 남긴 작품은 그가 이 땅에 온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그를 기억하게 만든다.

'봄 봄', '동백꽃', '산골나그네', '만무방', '금따는 콩밭' 등. 지금도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단편소설들이다. '봄봄'의 주인공은 점순이와 결혼하기 위해 데릴 사위로 들어가지만 점순이가 크면 성혼시켜준다는 장인의 말에 속아 3년 하고도 7개월이나 머슴살이를 한다. '동백꽃'의 여주인공 이름 역시 점순이다. 인생의 봄을 맞이해 성장해가는 충동적인 사춘기 소년·소녀의 애정을 해학적으로 그린 김유정의 대표작이다. 강원도의 동백꽃은 생강나무 꽃을 일컫는다. 봄이 되면 노랗게 피어나는 생강나무 꽃은 실레마을의 상징처럼 돼 버렸다.

김유정 문학이 마을 곳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는 문학촌 실레마을을 나는 4월와 5월에 각각 두차례 다녀왔다.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4월 어느날 실레마을에서 김유정 문학촌이 탄생할 수 있게 한 주역 전상국 촌장을 만났다. 또 실레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금병산 자락에 '예예동산'이란 보금자리를 마련해 살고 있는 노부부도 만났다. 서울의 집을 팔아 이곳에 제 2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이 부부의 집은 쉴 곳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개방돼 있다.

학대받는 여성, 혹은 다문화 가정의 가족들이 이곳에 와서 고단한 일상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간다고 하니 이보다 더 넉넉한 나눔이 있을까? 예예동산 가는 길엔 복숭아 꽃, 배 꽃이 예쁘게 피어나 방문객을 환영해 주는듯 했다.

실레마을에 뿌리를 내리려는 사람들. 그들은 이곳에 마음을 두고 삶을 풀어가고 이유를 '김유정을 사랑하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김유정 문학관을 함께 둘러보던 전상국 촌장은 "해마다 5월과 10월, 두차례 청소년 문학제와 김유정 문학제를 개최해 선생이 남긴 문학의 향기를 함께 나눈다" 고 말해준다. 10월에는 문학제를 위해 특별열차도 편성되는데 전상국 촌장이 직접 서울로 가 특별 열차를 타고 문학제 참가자들을 인솔한다고 한다. 특별열차는 청량리 역을 출발해 김유정역까지 김유정의 소설을 사랑하고 그를 기리고자 하는 사람들을 실어 나를 것이다.

▲ 김유정 생가 앞에는 모내기가 마무리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제 푸르게 자라 사람을 먹일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면......

문학관을 둘러보고 난 후 벤치에 앉아 가만히 건너편 김유정 생가 마루를 본다. 텅 빈 마루 위에 그가 가만히 발을 내딛는 듯 하다. 내가 앉아 있는 곳 대각선 방향으로 '디딜방아간' 이 보인다. 그 앞에 있는 평상에 한 남자가 앉아 호외를 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이 산골마을까지 호외를 뿌리게 했다. 호외를 읽는 그 남자의 표정에선 아무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김유정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마당을 굽어보며 동상이 돼 서 있는 소설가 김유정. 스물 아홉에 병마에 스러졌지만 그 작품은 여전히 살아있음에 그 이름이 갖는 향기 역시 특별하리란 생각이 든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떨까?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이며 어떻게 자리매김해 나갈 것인가? 가슴이 먹먹해져 다시한번 김유정 동상을 올려다 본다. 그리고 눈길을 돌렸더니 평상에 앉았던 남자는 어느새 자리를 뜨고 없다. 남자가 있던 자리에 놓여진 호외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휘리릭 날려 장독대 쪽으로 날아간다.

얼른 일어나 바람을 따라가는 호외 종이를 잡았다. 강원일보가 낸 호외다. 이미 읽고 또 읽은 것이었지만 몇겹으로 접어 가방에 넣었다. 알 수 없는 슬픔에 밀려 김유정의 생가를 나와 터벅터벅 걸었다. 걸으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편안한 안식을 기도했다. 그것 외에 지금 내가 달리 할 수 있는게 무에 있을까? 발길은 김유정 역으로 향했다. 머물렀다 떠나고......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곳, 그곳이 간이역이 아니던가.

▲ 고즈넉한 김유정 역

전국의 역명 중 문인의 이름을 딴 역은 '김유정역' 이 유일하다. 그만큼 김유정의 고향 실레마을의 의미가 큰 것일까. 김유정 역에 내리면 우선 반기는 것이 색색으로 꾸며놓은 팔랑개비다. 역사 안쪽으로 자그마한 정원이 꾸며져 있고 솟대와 팔랑개비가 김유정 역에 내리는 마을사람이나 여행객들을 반겨준다. 바람이 불면 한꺼번에 팔랑거리면서 돌아가는 팔랑개비의 물결에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을 느낀다.

아담하고도 정겨운 간이역 '김유정 역'. 역에서 문학촌까지는 200m, 도보로 가기 충분한 거리다. 이곳 김유정 역도 경춘선 전철 복선공사로 새 역사가 생긴다고 한다. 지금의 간이역은 그나마 보존한다고 하니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간이역에 앉아 팔랑개비의 물결에 취해 있는데 하행선 열차가 들어온다. 내리는 승객 중 수녀님이 눈에 띈다. 일면식도 없지만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수녀님은 기차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발길을 옮겨 서둘러 역을 떠났다.

이제 나도 떠나야 한다. 경춘선 상행 열차가 들어오면 나는 또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을 것이다. 오늘 죽음을 택한 사람은 무엇으로 남을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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