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김규항이 만난 예수, 김규항이 비판하는 교회

 

▲<예수전>에 드러나지 않은 '김규항이 만난 예수, 김규항이 비판하는 교회'의 모습이 궁금했다. 구교형 사무총장(성서한국)과 함께 성산동 <고래가그랬어>사무실을 찾았다.ⓒ유헌
   

김규항 발행인(<고래가그랬어>)은 <예수전>에서 교리화되고 박제화된 예수 이해를 벗어버리고 자신만의 예수를 만나라고 권한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를 넘어서 예수를 만나라고 외친다. 그러면서 2000년 전 예수의 삶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문제에 답을 준다고 말한다. <예수전>에 드러나지 않은 '김규항이 만난 예수, 김규항이 비판하는 교회'의 모습이 궁금했다. 구교형 사무총장(성서한국)과 함께 성산동 <고래가그랬어>사무실을 찾았다.

 

구교형 : 역사 속 예수에 대한 질문은 수많은 구설수와 함께 끊이지 않고 있다. <예수전>을 쓴 이유가 무언가.

김규항 : 책 머리말에 적은 대로 처음에는 예수라는 인물이 잘못 알려졌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책을 쓰고 나름의 묵상과 고민을 거듭하면서 조금 달라졌다.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우리 사회 진보운동이 봉착한 여러 딜레마나 정신적 혼란에 2000년 전 예수가 이미 해명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다. 신앙 때문인가, 진보의 희망 때문인가. 둘 다다. 판단은 독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러나 신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구교형 : 처음에 주제별로 쓰려다가 강독 형식으로 쓴 것은 김규항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머리말에서 밝혔다. 그럼에도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분명히 관점이 있다.

김규항 : 물론이다.

구교형 : <예수전>에는 사회학적 예수 읽기, 사회학적 성경 읽기의 기본이 흐른다. 그런 시각과 성경 자체가 말하는 방식이 어떤 지점에서 충돌하고 어떤 지점에서 제대로 봤다고 말할 수 있는가.

김규항 : '<예수전>은 이런 책이다'라는 말들이 부담스럽다. 다른 책을 썼더라면 부담이 덜 했을 거다. <예수전>에는 내 바람이나 마음의 결이 당연히, 어찌 보면 편안하게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전>은 독자 스스로 마르코복음을 만나보기 위한 책이다. 김규항의 <예수전>이지만 김규항의 바람은 자신의 예수 이해를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나의 예수 이해를 보여주면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예수 이해를 갖길 바라는 것이다. 

김규항이 쓴 <예수전>,
그러나 모든 이가 자기의 예수 이해 갖길…

▲ 김규항 씨(<고래가그랬어> 발행인)는 "<예수전>을 통해 나의 예수 이해를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예수 이해를 보여주면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예수 이해를 갖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유헌
구교형 : 김규항 씨에 대해 소문을 듣고 선입견을 갖고 읽었지만 읽고 나서 상당히 복음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교회에서 쓰는 말을 빌리자면 은혜를 많이 받았다.

같은 성경을 읽고 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가는 늘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홍길동전이나 심청전을 읽고 얻는 교훈은 비슷하다. 그런데 성경을 기반으로 부시의 행동도 나오고 마틴루터킹 목사의 행동도 나온다. 그런 면에서 자기의 예수 이해라는 것은 자신의 선입견을 되풀이하는 것 아닐까. 성경을 보는 다양한 관점이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경이 말하려는 맥락이 있지 않나.

김규항 : 내 나름의 견해가 들어가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예수의 견해를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부시가 성경을 외웠을 수는 있지만 읽었다고 보지 않는다. 교회 안에 마르코복음 정도는 달달 외우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게 '예수가 먹고 마시길 즐기는 자'라는 표현은 생경할 것이다. 실제로 성경을 읽는 것은 목사나 교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사람의 뜻을 전할 때도 혹시나 잘못 전달하지 못할까 주의한다. 진지한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하나님 자신인 양 그토록 권위적이고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살아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삶의 자리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묵상하며 성서 텍스트를 이해했는데, 예수가 볼 때 자기가 생각하지 않은 다른 얘기라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사실이 아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라고 꾸짖지 않으실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예수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

구교형 : 성경을 볼 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해석만이 가능하다고 보진 않는다. 그러나 제대로, 양심적으로 맥락을 이해하며 읽는다면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김규항 : 전적으로 동감한다. 엉뚱한 견해들은 진정한 읽기에서 나왔다고 보지 않는다. 자신들이 욕망하는 바를 덮어씌우려는 거다. 그러나 경향성의 범주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으며 하느님 앞에서 누구도 다른 의견에 대해 배타적이어선 안 된다.

이적의 사실성 여부보다 이적의 교훈이 중요

구교형 : 본문 중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공감을 많이 했다. 이적의 사실성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교리화된, 전통적인 의미의 이적 해석을 뒤집으려는 의도가 보였다.

김규항 : 물 위를 걷는 것과, 탐욕에 젖어 살다가 자발적으로 가난을 실천하고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 중 어떤 게 더 어려운가. 두 번째가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 위를 걸었던 이적을 증명하려는 분들이 있다. 그걸 증명해서 무엇을 하려는 건가.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지만 예수를 신앙할 계기가 되지는 않는다.

구교형 : 성경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사실성이 중요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게 아닌 부분은 사실성이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실성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예수를 단순히 사회학적 인물로 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육신, 즉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을 믿는다. 오히려 '과학적 세계에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는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기적인가, 아닌가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기적이기 때문에 다 틀렸다는 주장도 텍스트보다 해석이 먼저 개입한 거 아닌가.

김규항 : 기적의 사실성을 주장하며 예수를 마술사 취급하는 것을 저급한 이해라고 본다. 오병이어 이적에서 얻는 교훈은 자연현상에 반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내용이다. 마술이기 때문에 더 감동하고 아니기 때문에 감동하지 않는 게 아니다. 이적의 사실 여부는 체제 밖의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증명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겸손히 인정해야 하지 않나. 사실성을 부인한다는 말은 아니다.

바리새인 비판, 보수교회는 바리새인 신앙에도 모자라

구교형 :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의 비판을 현실에서 해석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바리새인의 위선이 사회 변혁을 가로막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적당히 희석해서 바꾸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 섬뜩했다.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 안에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걸 가로막는 현상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김규항 : 지배 체제가 100% 악의 얼굴만 가지면 뒤집힌다. 모두가 이명박의 얼굴이라면 사회는 바뀌게 돼 있다. 문제는 지배 체제 안에 합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개혁적인, 상당히 진보적으로 보이는 분파들이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 안에서 극우파와 개혁파는 원수처럼 으르렁 거린다. 그러나 인민의 입장에서는 두 세력 다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 안에 있다.

바리새인들은 훌륭한 시민이었지만 예수가 관심을 갖고 집중한 사람들을 배제했다. 90년대 이후 각광받은 시민운동은 신앙운동하는 사람들에게 굉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들은 민중운동의 민중을 시민으로 바꿨고 운동의 기반과 대상에서 인민을 배제했다. 그것은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진보라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진짜 진보를 가로막았다.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에서도 바리새인에 대해 이렇게 접근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

바리새인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건전하고 훌륭한 시민이었는데 예수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초기부터 했다. 왜인지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교회개혁운동을 존중하고 헌신성을 지지한다. 그러나 교회개혁운동의 의제가 진정한 교회를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회인가를 고민하는 출발점일 뿐이다. 세습이니 재정비리니 하는 것들은 한국교회 현실에선 매우 중요한 것들이지만 국제적으로 볼 때 창피한 이야기들이다. 바리새인의 위선을 버리자는 이야기를 교회개혁운동하는 분들에게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교회에는 시민의 양식이라도 지키라는 수준의 말밖에 못 하겠다. 이명박 장로 같은 사람의 신앙은 바리새인에게도 모자란 수준 아닌가. 불행한 사회에 불행한 교회다. 

'예수의 삶' 없는 교회 체제, 출발점부터 고민해야

▲ 구교형 사무총장(성서한국)은 "예수의 인성과 신성은 예수 안에서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창백한 신학으로 어디까지가 인성이고 신성인가 설명하고 재단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유헌

구교형 : 우문 같지만, 우리처럼 교회 체제에 포석된 목사들이 예수의 정신을 따를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김규항 : 당연히 가능하다. 하지만 교회라는 체제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 불리한 조건 속에 있다고 본다. 교회 체제를 섬기는가 하느님을 섬기는가 실존적 고민이 따라야 한다.

구교형 : 교회 체제가 예수 따르기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건가.

김규항 : 교회 밖에 있는 것이 더 좋고 교회 안이 나쁘다고 나누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출발부터 예수의 삶을 배제했다. 진정한 신앙을 가진 목사나 신도라면 자신이 믿는 교리나 신학에 대해 겸손히 의심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가 신으로 인정되는 배경과 과정, 예수가 황제와 지배자의 그리스도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 짚어봐야 한다. 건강한 교회라 할지라도 이런 얘기나 생각하는 분은 별로 없다. 기독교 교리나 체제에 충직한 태도가 자칫 그런 경향성을 나을 수 있다.

교회가 하느님나라를 구현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한다. 문제는 하느님나라가 무엇인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을 정립하고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며 황제의 교회가 된 지점, 서방교회의 출발점은 거기다. 출발 당시부터 하느님나라 개념에 있어서 예수가 싸우고 실천한 것과 차이가 있었다.

구교형 : 예수의 신성을 사회학적으로 평가하는 것과 신앙을 갖고 믿는 것은 다르다. 예수가 하느님이 아닌데 니케아 공의회에서 신으로 인정한 건 아니다.

김규항 : 그 전까지는 예수의 신성이 기독교체제에서 확정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신이라는 세력도 있었고 인간보다 높고 신보다 낮다는 세력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보자. 예수의 신성에 대해, 그것이 교리화된 배경에 대해 사려 깊고 성숙한 태도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목사나 교회가 있는가.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방어하려고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없는 이들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적도 마찬가지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에게 증명할 수 없는 것을 굳이 부각해서 긴장을 유발할 이유는 없다.

김규항이 말하는 하느님나라, 자본주의 극복과 인간성 회복에 국한되나

구교형 : 김규항 씨는 하느님나라는 비인간화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인간화·생명화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이 과연 예수가 말한 하느님나라운동과 일치하나. 과거에는 하느님나라의 현존성 배제하고 죽어서 가는 천당쯤으로 여겼다. 요즘은 하느님나라의 현존성을 많이 이야기한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수용하고 있다.

김규항 : 일치하지 않는다. 당연히 편린일 거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어떤 차원의 교회든 모든 사람을 신도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란 생각을 버려야한다. 교회란, 교회라는 담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한 전진기지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극복과 인간성 회복은 당면한 현실 속에서 굉장히 큰 문제다. 어떤 것보다도 많이 하느님나라의 지향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좌파 운동가들과 이야기하다보면 혁명론이 없어 고민한다. 비전과 열정을 제시할 유토피아론이 없다. 뭔가 더 특별한 새로운 이념이 출현하길 바란다. 예수는 바로 그게 우리 안에 잉태됐다라고 말한다.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은 새로운 게 아니다. 회복하는 거다.

예수는 예언자들과 달리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다. 잔치에 비유하며 초대에 응하면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하느님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 하느님께서 준비해놓고 우리를 초대했다는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실 속에서 하느님나라의 편린을 본다. 예를 들어 권정생 선생님 같은 분은 아동문학가 중 인세 수입이 가장 많은 분이지만 한 달 생활비 20-30만원으로 사셨다. 자발적 가난이 올바르기 때문에 고통을 견디며 괴롭게 사신 게 아니다. 그분은 그렇게 사는 게 편하셨다. 맘몬의 세상에서 경제적인 면에서 하느님나라에 입장한 사람이다. 하느님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 하느님께서 준비해놓고 우리를 초대했다는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구교형 : 내가 볼 때 예수의 인성과 신성은 예수 안에서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창백한 신학으로 어디까지가 인성이고 신성인가 설명하고 재단하려고 한다. 성경 속에서 발견하는 예수의 신성은 겸손한 신성이다. 기적을 행한 것 역시 마술적으로 쇼를 보여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제한적이다. 하느님나라 역시 잔치이자 심판일 수 있다. 모순되지 않는다. 해방의 날은 호위호식하던 친일파에게는 심판과 같은 날이었다.

하느님나라의 초월성에 대해 진보신학 쪽에서는 거리를 둔다. 나는 하느님의 심판이나 하느님나라의 완성이 사회적 변혁 또는 인간성을 추구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본다. 자꾸 모순된 방식으로 설명하는 건 진보신학 쪽에서 극복할 점 아닌가.

김규항 : 모순되도록 강변된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난 거라고 생각한다.

신관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서양 사람들이 자기의 인식 기반에 의해 주장한 걸 우리가 받아들인 것 아닌가.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사람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처단한 사람들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하느님을 우리 삶의 외부에서 전적으로 주관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서양인들의 인식과 철학이다. 그런 신관을 폐기하고 토착화란 미명하에 한국 신관을 들여와야 한다는 게 아니다. 서양의 신관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는 근거가 있으므로 사려 깊은 태도로 신관을 성숙화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논의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기사 제공: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co.kr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