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처럼 - 김유진]

'땐뽀걸즈', 이승문, 2017. (포스터 제공 = KT&G 상상마당)

소녀들을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백지장처럼 보던 시절이 오히려 낫다 싶을 정도다. 오늘날 소녀들이 대중매체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소비되는 방식은 또래에게 극악한 폭력을 행사하는 악마이거나, 제 몸을 내팽개치며 삶을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성매매 여성이거나, 결코 남성이 위압당하지 않고 감당할 만큼의 성적 매력으로 ‘삼촌’ 팬들에게 환영받는 연예인의 모습이다. 불특정 다수의 소녀들에게 향하는 롤리타 콤플렉스를 대중매체와 일상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문화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소녀들, 게다가 ‘땐스스뽀츠(땐뽀)’ 춤을 추는 소녀들의 이야기라니. 소녀들의 몸을 훑는 무수하고 무심한 카메라의 시선을 봐 온 기억으로서는 투명하게 맑은 영화 포스터와 화면이 오히려 그러한 시선을 애써 반대로 감추기 위한 보호막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신의 시선을 통해 소녀들을 향한 시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소녀들을 향한 시선이 어떠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이 영화는 조선업이 쇠락해 지역과 가정 경제가 휘청이는 거제시의 여자상업고등학교의 댄스스포츠 동아리 소녀들을 가만히 응시한다. 소녀들의 가정은 제각각 구조조정으로 아버지가 일자리를 잃고, 어린 동생이 다섯이나 되고, 알바 월급으로 월세를 내며 동생과 단둘이 살아가는 등 소녀들이 공부에만 충실하라는 주문만 지키면 마냥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보금자리가 아니다. 소녀들은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고 지각, 조퇴, 결석이 부지기수이며 시험 때 2번 혹은 3번으로 답을 내리 쓰고 잠들어 버리는 게 예사다.

'땐뽀걸즈'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KT&G 상상마당)

이 소녀들에게 취업 외에 유일한 삶의 목적과 당위가 되는 것이 ‘땐뽀’ 동아리다. 춤에 신들려서가 아니다. 그곳에는 양 떼를 이끄는 목자와도 같은 훌륭한 교사 한 명이 있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수업 시간에 잠만 자는 학교이지만 선생님이 기다리는 연습실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기에 학교에 간다. 취업에 쓸모없고 생계가 걸린 알바에 걸림돌이 되는 이 하나의 일이 자신의 존재감과 삶의 의미를 확인시켜 준다고 느낀다.

소녀들을 좇는 카메라의 시선이 또 하나 보여 주는 건 바로 댄스 동아리 교사의 소녀들을 향한 시선이다. “이리 오너라, 예쁜이들아.”라고 말하는 50대 남교사의 언어가 그저 학생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애정만으로 순정하고 충만함을 낯설게 깨닫는다. 소녀들이 50대 남교사에게 반말로 대화하고, 놀리고, 툭툭 치고 때리기까지 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는 청소년들을 어떻게 바라보며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지 알려 주는 또 하나의 시선이다. 그 시선으로 비로소 소녀들의 춤추는 몸은 지금까지 소녀의 몸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에서 자유를 얻고 자신을 탐색한다.

영화의 시선은 소녀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아야 하는지 외에도 어떻게 시선을 거두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선생님이 동생들에게 주라며 사 준 빵을 갖고 집에 들어가는 혜영이를 따라가던 카메라가 혜영이 집 대문에 멈추어 섰을 때, 집 안까지 쫓아 들어가지 않고 동생들과의 어렴풋한 대화를 음성으로만 들려줄 때 혜영이가 원치 않는 시선을 거둘 줄 아는 카메라의 정지한 움직임은 그 어떤 미학보다 훌륭해 보였다. 가족사를 속속들이 캐지 않는 시선이 줄곧 보여 준 소녀들에 대한 예의가 혜영이 집 대문 앞에서 더욱 선명했다.

'땐뽀걸즈'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KT&G 상상마당)

이 영화는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 영화이기에 극적 흥미와 감동을 자아내는 서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청소년, 성장, 춤, 동아리 등을 소재로 한 다른 극영화처럼 소녀들이 동아리 활동으로 흥미진진한 경험을 겪지도 않고('스윙걸즈') 폐광촌이란 지역 환경을 딛고 발레리노의 꿈을 피워 내지도 않으며('빌리 엘리어트') 폐광촌을 관광지로 성공시키고 기성 세대와 화해를 이루는 주체가 되지 않는다.('훌라걸즈')

소녀들을 조심스레 만난 카메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소녀들의 삶은 거제시라는 지역 경제처럼 언제든 위태로울 수 있겠고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교사의 사랑이 불러 모은 연습실에서의 안전한 기쁨은 두고두고 소녀들의 삶에 쉼터가 될 것이기에 걱정되지 않는다.

선생님은 학생들 ‘모두에게’ 음식을 먹여 주셨지만, 내게 음식을 주실 때 선생님의 ‘유일한’ 마음을 느낀다는 한 학생의 고백은 자신의 삶을 헌신하며 소녀들을 지지한 선생님의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아마도 어른이 아닌 소녀였기에 그 마음을 아낌없이 받아들였을 테니 어린이, 청소년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조금도 거르고 가릴 필요가 없다. 사랑할 것이 너무 많다. 

 
 

김유진(가타리나)
동시인. 아동문학평론가. 아동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에서 글쓰기를 강의한다. 동시집 “뽀뽀의 힘”을 냈다. 그전에는 <가톨릭신문> 기자였고 서강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곳에서 아동문학과 신앙의 두 여정이 잘 만나길 바란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