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1. 유니세프 분유 먹고 자란 대한민국 어르신들

유엔 기구 중에서 한국에서 제일 먼저 활동을 시작한 것은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UNICEF)이었습니다. 1948년 한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한국 어린이들의 실태를 조사했고, 전쟁이 나자마자 긴급 구호사업을 펼쳤습니다.

전쟁 통의 아수라장에서 유니세프는 우리나라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 약 6300만 킬로그램의 분유와 30만 장의 담요를 비롯해서 식량과 의류, 비누 등 구호품을 대량 지원했습니다. 이때 들어온 분유는 1000만 명의 어린이가 1년 내내 하루 한 잔씩 마실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지요. 유니세프 설립 이후 단일 국가에 대한 지원으로는 최대 규모였습니다.

어릴 적에 못 먹고 자란 아이가 커서도 여러 가지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히 영유아기는 신체적 성장과 기능적 발달이 가장 왕성하게 일어나고 지적, 정서적 발달이 이루어지는 시기라서, 이때 영양 섭취는 신체 성장은 물론 골격 성장, 질병 감염 등 일생 동안의 성장과 발달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950년대 한국 어린이들이 오늘날 단군 이래 최장의 평균수명을 기록하는 세대로 자랄 수 있었던 데에는 유니세프의 구호 활동이 단단히 한몫했던 것입니다.

2. 유니세프, 또다시 한반도의 어린이를 위해 나서다

그 고마운 유니세프가 지난 5월 10일, ‘2017 북한 어린이와 여성 상황 분석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1990년대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북한의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유니세프의 북한 지원 소식을 전하는 공식 누리집(www.unicef.org/dprk) 갈무리.

보고서에 따르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연령대의 북한 여성 2/3가 영양부족 상태이고, 2살 미만 북한 유아의 73퍼센트도 적절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영유아 시기에 배를 곯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북한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1994년부터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알려진 기근을 6년 내리 겪어 봤기 때문이지요.

당시 북한 어린이 60퍼센트 이상이 영양실조를 겪었다고 하는데, 유엔의 식량농업기구(약칭 FAO)와 세계보건기구(약칭 WHO)의 조사에 따르면 1998년의 경우 12개월에서 24개월까지의 아동 중에서 급성영양장애로 진단 받은 숫자만 30.9퍼센트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양 공급이 적절하지 못한 상황으로 말하자면 거의 전체 국민을 망라합니다. FAO 기준으로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난의 행군 시절에 영유아기를 보낸 세대들은 태어나기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태어났다 해도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발육이 부진합니다. 오죽하면 지난 2012년에는 북한군의 입대 자격이 키 145센티미터 이하에서 142센티미터 이하로 조정되었지요. 1995년, 고난의 행군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이 수도 적은데다, 왜소하기 짝이 없는 탓이었습니다. 142센티미터면 우리나라 초등학교 5학년 평균 신장보다 작습니다.

유니세프는 이런 북한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합니다. 어린이와 임산부, 수유모에게 영양보충식품을 제공하는 식량 지원과 의료 시설 확충과 진료 확대 등 보건 지원 사업, 그리고 식수 개선 사업을 하겠다며 세계인의 동참을 청합니다. 한때 최대 규모의 구호물자를 받아먹은 덕에 이제는 어엿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또한 그 구호에 함께해 주기를 요청 받았습니다.

3. 지금은 적기가 아니다?

이 같은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 정부가 800만 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고려한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논쟁의 군불을 지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을 때까지는 심지어 인도적 지원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굶주린 아기에게 정권의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이겠습니까? 저 어린아이들에게 북핵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참고 있으라고 해야 할까요? 배고픈 아이의 굶주림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북한의 부모들의 마음은 또 어떻겠습니까? 영양이 부족해서 비실대다가 채 크지도 못하고 질병에 시달리는 어린 자녀들을 보는 부모의 처지는 어떨까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다소 위협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북한 정권의 오판과 실책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굶주린 아이들을 보면서 지금은 도와줄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차마 사람으로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그 일을 ‘인도적 지원’(Humanitarian aid)이라고 부릅니다. 더욱이 국제사회의 분유를 먹고 자란 사람이라면, 게다가 한 해 10조 원이 넘는 음식 쓰레기를 배출하는 국가의 사람이라면 때를 따지며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 인도적 지원인 것입니다.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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