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9월 17일(연중 제24주일) 마태 18,21-35

성경에 표현되는 계시의 핵심은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이다. 이 주제는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에 있어서도 규범이 되어야 한다.

용서는 항상 무상이다

마태오 복음서 18장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련의 가르침들을 담고 있다. 용서는 이러한 가르침들 중의 하나다. 베드로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용서해야 하는가를 알고 싶어 한다.(마태 18,21) 주님께서는 이 질문을 훨씬 더 넓은 지평 속에서 다룬다. 즉 우리는 항상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18,22) 신비스러운 표현의 의미다. 또한 창세기 4장 24절을 보면 반대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 의미를 빗대어 암시하기도 한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 사랑은 숫자로 셀 수 있는 의무들과 결코 견줄 수 없다. 상호 용서는 공동체를 만들며, 우리를 신뢰하는 사람들로 만든다.

예수님의 이 메시지 선언은 마태오 복음서에서만 발견되는, 가장 아름다운 비유들 중의 하나인 매정한 종의 비유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셈의 청산”(18,23)은 무상의 사랑에 근거하는 하느님의 정의 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종의 요청에 따라, 왕은 빚을 탕감해 준다. “만 탈렌트”(18,24)는 되갚을 수 없는 엄청난 액수(가난한 국가들의 국제 부채와 같은 수위의 돈)를 말한다. 그러므로 종이 빚을 다 갚겠다고 한 말은 단순히 주님의 마음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18,26) 왕의 용서는 전적으로 무상의 차원이다. 왕은 그저 “가엾은 마음이 들어”(18,7) 용서한다. 언젠가 종이 빚진 것을 다 갚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용서한 것이다.

종의 요청에 따라 왕은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웃에게 원한을 품지 말라

그런데 종의 행위는 주님의 행동과 완전히 정반대다. 동료 종은 그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일 임금이었다), 즉 쉽게 갚을 수 있는 금액을 빚지고 있었는데, 채무자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악한 종”(18,32)은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엄격한 정의에 따르면, 왕은 그 악한 종을 감옥에 보낼 수 있으나, 방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무상의 사랑에 근거하여 새로운 유형의 정의를 보여 주었다. 이 새로운 정의는 사람들을 그들이 가진 것보다 존재 그 자체에 근거하여 받아들인다.

예수님의 하느님은 그분이 선하시기 때문에 사랑하신다. 이 한계가 없는 사랑 앞에서 사람들의 장점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분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행위의 모범이다. 주님은 우리 역시 우리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그분의 계약을 항상 새롭게 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집회 28,7) 무상의 사랑 앞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27)라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로마 14,9)이신 분의 무상의 사랑, 끝이 없는 사랑보다 더 요구적인 것은 없다.

무자비한 경제적 자유방임주의에 의해 쓰러진 이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전대미문의 잔인한 대립 앞에서, 정의에 대한 깊고 심오한 요청들이 떠오르고 있다. 이 정의는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권리에 도달하기 위하여 소위, 합법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정의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무상으로 사랑할 때에 우리는 정의를 충만하게 또한 뿌리 깊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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