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24

예수의 고향 

성서에서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마태 2,1), 실제로는 나자렛에서 태어났거나 그곳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난한 이들이 많은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주로 활동하던 예수가 어느 날 고향 나자렛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 회당에 들러 성서도 읽고 설교도 하고, 고향 사람들을 만나 대화도 나누었다. 성서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변형된 내용들이 전해오지만(마태 13,54-58; 마르 6,1-6, 루카 4,14-30), 대체로 예수가 고향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어릴 적 모습이나 집안에 대해 잘 알아서인지, 보잘 것 없는 시골 동네 출신 ‘요셉의 아들’에게서 나오는 놀라운 설교에 수군거리며 감탄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듣자하니 다른 곳에서는 기적도 많이 보여주었다는데, 네 고향에서 먼저 보여주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이었던 것 같다.(루카 4,23; 마태 13,57 참조) 출신 성분이나 배경도 시원찮은 이가 유명세를 타고 있으니 질투심이 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의 반응이나 태도에 다소 실망했는지 예수는 이렇게 탄식했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마르 6,4; 마태 13,57) 

뜻밖의 구원 

다른 성서들과는 달리 루카복음서에서는 주변의 반응이 냉소적이자 예수가 작심한 듯 하느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임하리라는 식의 설교를 한 것으로 나온다. 기원전 9세기 예언자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절, 지독한 가뭄이 들어 이스라엘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속출했는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한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 식량 문제를 해결하게 해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 때는 이스라엘에도 치료받아야 할 심한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하느님은 이스라엘인이 아닌,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해주셨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사렙다, 시리아 지역이 유대인들의 눈으로 보자면 부정한 이방인의 땅이었다는 데 있다. 하느님이 의로운 이스라엘 ‘안’보다 부정한 이스라엘 ‘밖’에 먼저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는 것이다.

성서학적 견지에서 보면, 이 예수의 설교는 ‘이방인’을 통해 복음이 전승되던 초기 교회의 상황을 반영하면서 생성되고 유통되던 이야기겠지만,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이 설교의 요지는 특정한 혈연에 속한다고, 그저 하느님을 안다고 구원까지 받으리라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가 들어있다.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의 혈통, 특정 제도, 집단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신분이나 혈연상의 이유로, 그리고 종교나 이념적인 이유로 죄인을 양산하고 배타한다면, 도리어 하느님의 구원이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일종의 신학적 경고였던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리가 너희를 사망케 하리라 

예수가 이런 식의 설교를 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중립적이거나 때로는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낸 뒤 산 벼랑까지 끌고 가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다.(루가 4,29) 예수를 낭떠러지에서 밀쳐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위기의 상황을 모면하고 슬쩍 빠져나가 제 갈 길로 갔다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느님이 이른바 선택된 백성인 자신들이 아니라 이방인을 구원하신다는 식의 선포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자신들을 모독하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하느님이 자신들 ‘밖’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생각을 도무지 해보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이 발언은 오랜 집단적 전승과 개인적 신념을, 그리고 ‘거룩한’ 하느님과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발언이나 매한가지로 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절벽에서 예수를 밀쳐 죽이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분명하고 분명한 것은 하느님이 혈연적, 민족적, 관습적인 이유로 자신들만을 구원하시리라는 이스라엘의 당연한 듯한 편견을 예수는 신앙과 지성의 양심에 비추어 용감하게 깨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만 보면 예수의 언행은 늘 그런 식이었다. 특히 기득권층의 편을 들지 않고 하느님의 구원에서 소외된 듯한 사회적 약자, 한 마디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 편을 들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은 성체, 성사, 성경, 성당 등, ‘거룩할 성’자로 도배되어 있는 듯한 교회보다도 ‘거룩함’과 거리가 훨씬 멀 것 같은 천박한 곳을 먼저 찾으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내용이다.

너를 내게서 분리시키는 ‘거룩’보다는 너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자비’를 가르치고 실천하던 예수는 ‘죄인과 함께 지내니 너도 죄인’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며 격노하던 기득권층, 이른바 사회적 ‘의인들’의 반발을 사 결국 처절한 죽음으로 내몰려가게 된 것이다. ‘진리’를 제대로 실천하려다 보면 제 명대로 살기 힘들기는 여전한 상황인 것 같다. 

하느님의 팔은 밖으로도 굽는다 

예수의 설교를 이 글의 주제에 비추어 해설하자면, 하느님의 구원은 교회 안에도 그리스도교 안에도 독점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있다. 예배당이라는 건물이, 교회라는 제도가 하느님의 구원을 선점하거나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회 안에 있는 이들 중 그렇게 상상하고 기대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하느님은 어쩌면 죄인으로 간주되는 이들에게, 신과 관계없을 것 같은 이방의 동네에 당신을 더 잘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인간의 기대치와는 달리 하느님은 ‘뜻밖의 곳’에 임하신다는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하느님의 ‘팔은 밖으로도 굽는다’. 아니 어디로든 굽는다.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도 하느님은 구원의 팔을 뻗치신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가 신학적 의미에서의 ‘만인구원론자’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동족 유대인에게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율법의 형식이 아닌 근본정신을 따를 것을 제시하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만인구원론을 연상하게 해주는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의 단 한사람도 고쳐주지 않으셨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일이 있다. 구원의 진정성과 보편성은 누군가 죽거나 처절한 죽음의 위기에 몰리고서야 드러난다는 점이다. 진리를 가로막는 암벽에 부딪쳐 누군가 머리가 깨지고서야 드러나는 진실의 역설을 그리스도인이라면 특히 더 늘 의식해야 한다. 교회가 하느님의 구원을 맡은 새 이스라엘이라고 착각하다가 이스라엘 사람들 중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단 한 사람도 고쳐주지 않으셨다”(루가 4,26-27)는 경고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을 먹이고, 의인이 아닌 죄인을 치유해주셨다는 발언에 분노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서에 따르면,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먼저 드리우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를 절벽에서 밀쳐 죽이려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교회는 종교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적 죄인을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을 자명하다. 그런 식의 비판의 말을 한다고 '죽음'으로 내몰아서는 안 되리라. 예수가 그랬듯이, 이 땅의 선구자들은 그 죽음의 위기를 기꺼이 감수해야 하리라.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역전시키기 위하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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