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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한 수박[부엌데기 밥상 통신 - 44]

목구멍으로 악 소리가 나오려고 하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 가며 여름을 났다. 아이가 셋, 강아지가 일곱,(원래는 아홉 마리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두 마리가 죽었다.) 휴가철을 맞아 보름 가까이 손님 치레... 그러한 와중에 다랑이가 심한 배탈이 나서 일주일 가까이 앓았으니 밥 지으랴, 개밥 하랴, 죽 끓이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괜찮아지겠지. 이 여름이 아무리 가혹해도 오는 가을을 막을 수는 없을 거야.' 나는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주저앉아 하루만, 아니 반나절만 쉬고 싶었지만 쉬면 쉰 만큼 눈덩이처럼 일이 불어나 버린다는 걸 아는 이상 어찌 쉴 수가 있나. 마음껏 쉴 수 있는 밤이 있음에 감사하며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안간힘을 쓰며 얼마간을 살았다.

그러고 났더니 정말 가을! 하늘은 청명하고 아침저녁으로 온몸을 휘감는 찬 기운이 상쾌하다. 수풀을 헤치고 밭에 들어가 숨바꼭질 놀이를 하듯이 두리번거리며 토마토, 오이, 애호박, 가지, 피망 같은 것들을 따오는 재미는 얼마나 쏠쏠한지! 아이들도 수시로 밭에 들어가 옥수수를 따기도 하고 수박이 얼마만큼 컸나 참외가 노래졌나를 살피느라 바쁘다.

   
▲ 밭에 나가면 뭐라도 먹을 게 나온다. 열매가 풍성해 더욱 뿌듯한 가을. ⓒ정청라

"엄마, 참외가 세 개인 줄 알았는데 네 개나 있네. 근데 언제 노래지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날마다 조금씩 노랑이 짙어지고 있잖아. 잘 기다려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엄마, 근데 이거 수박 맞아? 왜 이렇게 생겼어?"
"율 이모가 구해 준 수박씨를 심은 건데, 멀리 헝가리란 나라에서 온 수박 씨앗이래. 줄 무늬가 없어서 신기하지?"

아이들과 함께 수박 열매 구경을 하다가 그 중 하나가 썩은 건지 엉덩이 쪽에서부터 까맣게 시든 듯한 모양으로 있는 것을 보았다. 익었을까 안 익었을까 딸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한낮의 더운 시간에 따서 들고 왔다.

땡볕 아래서 일광욕을 즐긴 터라 갓난아기 머리통 만한 수박도 따끈따끈.... 그 따끈한 덩어리를 아이들 없는 데서 몰래 쪼개어 보기로 했다. 수박을 보면 군침부터 흘리며 달려들 텐데 행여라도 수박이 썩었거나 안 익었으면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해서 나 혼자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수박을 쪼갰다. 쩌억, 짜잔!

다행스럽게도 수박이 익었다. 새빨갛지는 않아도 적당히 붉고 씨앗도 까맣게 여물었다. 일단 씨앗부터 추려내어 씻어서 말려 놓고,(왜? 내년에 또 심으려고) 수박 반 통은 신랑 몫으로 남겨 두고 나머지 반통을 아이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얘들아, 수박 먹자!"
"와, 수박 익었어?"
"야호, 수박이다."

세 아이들이 무섭게 몰려와 수박 맛을 보는데 반응이 다 달랐다. 1번 박다울,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고는 "맛있네" 한다.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생각보다는 맛이 괜찮다는 반응이다. 2번 박다랑, 가장 큰 것을 움켜쥐고 먹더니 찡그린 얼굴로 "왜 안 달아?" 라고 묻는다. 하루 전에 이웃집 할머니한테 얻어먹은 수박 맛과는 많이 달라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3번 박다나, 아무 말도 없이 양 손에 하나씩 두 개나 움켜쥐고 흡입 삼매경에 빠진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다니!'하고 놀란 표정으로 말이다.

   
▲ 수박 맛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정신없이 먹어대기 시작한 다나. ⓒ정청라

"엄마, 시원하게 먹으면 더 맛있지 않을까?"
"다나를 봐. 따끈따끈해도 저렇게 맛있게 먹고 있잖아."

우린 모두 다나 앞에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너무 달고 너무 시원한 수박에 길들지 않은 저 순진한 입맛을 보라. 마치 곰이 벌집을 통채로 들고 꿀을 핥아 먹는 것 같은 모양새라 남은 수박 조각들까지 기꺼이 다나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남겨 둔 수박 반 통까지도. 어쩜 저렇게 맛있게 먹을까? 내 경우엔 고슴도치가 자기 새끼 예뻐하는 듯한 심정으로 조금 덜 맛있어도 '아이고, 맛있네!' 하고 액션을 취하는 면이 있는데 다나는 진정으로 맛있어서 맛있게 먹는 것 같았다. 셋 중 하나라도 저렇게 먹어 주니 얼마나 뿌듯한지.... 만약 내가 수박이라면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느껴질까? 비싼 값에 팔려 가 맛이 있니 없니 껍질이 얇니 두껍니 타박을 듣는 것보다 훨씬 고귀한 삶을 산 것일 테니까.

어디 수박뿐이랴. 우리 밭에 사는 모든 것들은 모양도 제각각이고 크기도 자그맣지만 우리 집 밥상에서만은 눈부시게 빛난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열매를 이루었음을 다 알고 있으니까. 간절함으로 오래 기다려 만난 소중한 생명이니까. 때문에 번거롭더라도 반드시 씨앗을 남겨 생명을 이어가게 돕고 있다. 이렇게 만난 이상 한 목숨되어 끝없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고 보면 나는 아주 조금씩 깨닫고 있는 듯하다. 내가 논과 밭에서 만나는 생명들이 돈으로는 바꿀 수 없는 나의 벗이고 하늘임을 말이다.

   
▲ 혼자서 수박 반 통을 거의 다 먹고는 남은 반 통까지 넘보는 다나. 수박을 잘라 주지 않았는데도 혼자서 속을 다 파먹었다. ⓒ정청라

덧.
나는 다나와 한 몸된 수박을 위해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말투를 흉내 내어 우습지도 않은 시까지 지어 올리기에 이르렀다. 부끄럽지만 아래에 덧붙인다.

수박, 내 형제여

여름 건너 가을 문턱
기나긴 기다림 끝에 우리에게 온
수박, 내 형제여

조그맣고 어리숙한 너를 보고
너무 크고 너무 잘생기고 너무 달달한 수박들은
크게 웃고 신나게 떠들어댈 거다.

'너는 결코 팔려 가지 못할 거야!
그래 가지고 수박 노릇 제대로 하겠냐?
넌 씨도 남기지 못할 녀석이야.'
번쩍거리는 스티커가 훈장인 양
팔려 가는 제 자리가 최고인 양
아무렇게나 지껄여 대겠지.

그러면 그러라지 뭐.
너는 우리 밭 식구, 심장 같은 속을 품은 생명!
이만큼 붉어지는 데도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고 있어.
거짓 없이 진실하게 살아온 걸 죄다 알고 있어.
결과가 어떠하든 매 순간 네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우린 너무 크지 않고 조그마한 네가 미더워.
너무 잘생기지도 너무 달지도 않은 네가 흐뭇해.
너를 통해 수박의 민낯을, 하늘의 생기를, 만날 수 있으니까.
팔려 온 수박들이 어떻게 꾸며졌는지 속내를 들여다볼 수도 있으니까.

기억해 주렴.
우리의 순진한 입맛은 네가 진짜라는 걸 알고 있어.
있는 그대로 따끈따끈한 너마저도
끔찍이 사랑해.
그러니 내년에 다시 만나자.
네가 남긴 소중한 유산,
씨앗이 있으니까.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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