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시사비평 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사회교리와 인간관계[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1. 사람을 마주치지 않는 사회

사람 많은 대도시일수록 사람과 마주할 일은 줄어든다. 출근길부터가 그렇다. 더 이상 버스에서 회수권을 받는 운전기사도, "오라이~"를 외치는 버스 차장도 없다. 후불식 교통카드가 단말기를 스치며 내는 삐익  전자음이 그 소리를 대신한다. 일찍 나오느라 먹지 못한 아침밥을 편의점 삼각 김밥으로 대신하는데, 여기서도 말이 필요 없다. 진열된 김밥을 계산대로 옮겨 놓으면, 또 다시 삐익, 전자음과 함께 계산대에서 미리 합을 맞춘 듯 익숙한 대사를 주고받을 뿐이다. 출근 기록도 마찬가지, 리더기에 전자 신분증을 읽히고 건물로 들어선다. 엘리베이터와 로비 같은 곳에는 각종 공지와 안내가 LED화면을 따라 나온다. 부서 간에 전화 통화도 줄어든다. 문자나 메신저가 더 바쁘다. 웬만한 일들은 전자 서류로 이루어지고, 의견을 모으기 위해 회의를 하는 것보다는 전자 서식과 통계 프로그램을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이렇듯 하루 종일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사람과 마주치지 않는 희한한 생활이 도시에서는 가능하다. 사람 사이에 이래라저래라 말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성가시니까 기계와 전광판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확보해 놓는다. 눈치 볼 일도 없고, 밀고 당기는 신경전을 벌이거나 참아 줄 일도 없다. ‘쿨하게’ 할 말 있으면 하면 되고 듣기 싫으면 안 들으면 그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기계와 도구와 시스템의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저기에서 여기로 오려 해도 올 수 없다. 그러니 상대가 말을 듣든 말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될 뿐. 인터넷 상에는 내 말에 환호해 주고 ‘좋아요’를 눌러 줄 사람들이 있으니, 내 뜻을 설득력 있게 전하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하고 눈치를 봐야 하며, ‘고구마 답답이’ 앞에서 참고 또 참아야 하는 구차한 현실 세계는 무시해도 될 것 같다.

2. 사람 없는 곳에서 사람 사는 사회를 꿈꾸기

우리 사회에 사람이 사람을 피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면 대 면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안 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일이 잦아진다. 회의를 하다가 제 뜻대로 안 되면 동료를 설득하기보다는 뛰쳐나가 버린다. 현실의 몇몇 이웃을 설득하는 일보다 온라인상에서 수십 수백 명을 선동하는 일이 훨씬 쉬운데, 뭣 때문에 현실 세계에 연연하겠는가. 같은 맥락에서 온라인상의 거대 담론에 기대어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경우도 본다.

인간적으로는 그럴 만도 하다. 현실은 메마르고 거칠다. 현실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나의 가능성을 만개시키려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게임 디자이너 제인 맥고니걸이 쓴, "누구나 게임을 한다"라고 번역된 책의 원제는 "Reality is broken"이다. 맥고니걸은 현실 대신 게임에 몰두하는 원인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게임은 노력한 만큼 공평한 보상을 주는데다가 실패해도 리셋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현실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 우리 사회에 사람이 사람을 피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거꾸로 말하면 현실은 노력해도 안 되는 좌절의 연속이면서 한 번 실패하면 되돌리기 힘든, 그야말로 형편없이 조각나 버린 초라한 실재다. 이 초라한 현실 속에서 ’공동의 집‘을 제대로 가꾸고 만들어 가려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은 게임 세계나 온라인, 혹은 거대 담론의 세계에서처럼 쉽게 보상받지 못한다. 게임의 세계나 가상의 담론 공간에서는 정제된 설탕처럼 달콤한 보상이 즉각적으로 따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상의 세계는 '능력을 발휘해 동료와 함께 웅대한 목표(epic win)을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을 주지만, 현실의 세계는 이권이나 권력욕, 명예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관계의 엉켜 버린 매듭을 인내롭게 풀어야 하는 수고를 준다. 당연히 설탕처럼 달콤한 가상의 세계와는 다르다.

그런데 설탕 맛을 지나치게 탐닉하면, 다시 말해 현실의 쓴맛을 꺼리게 되면, 그때는 쉬운 해결책이 유혹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내와 대화 대신에 기계와 구조와 제도를 넣어 버리려는 유혹 말이다. 사람과 만나고 대화하고,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는 힘든 과정은 생략해 버리고, 구조와 제도와 거대한 이상만 남는 가상현실의 유혹이 이웃의 자리를 앗아갈 수 있는 것이다.

3. 사회교리, 그리고 사람 사는 이야기

사회교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람 냄새가 더 훈훈하게 풍겨야 할 것인데, 현실은 공동체가 분열되고 인간관계가 삭막해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다 보면 주장은 점점 더 격해지고 사람 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당연히 따라오는 긴장과 인내와 수고가 힘들게 느껴질수록, 주고받는 대화는 사라지고 제도와 시스템을 탓하는 일방적인 주장들만 번뜩이게 된다. 함께 사는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자고 시작한 일인데, 정작 사람 사는 이야기는 없고 주의 주장만 겨루는 형국이다.

해서 어느 공동체에서든 사회교리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면 명심할 일이다. 내 주장이 얼마나 옳은지 입증하려고 들지만 말고,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어떻게 거리를 더 좁힐 수 있을까 노력할 일이다. 결국 사회교리는 함께 살자는 이야기 아니든가.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