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넌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이모~ 할머니가 나 의사 되면 좋겠대. 근데 난 농구 선수가 되고 싶어. 이모가 지금 나라면 어떻게 할 거야?”

초등학교 3학년인 조카가 비장한 표정으로 던진 질문이 너무 진지하여 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런 구시대적 발상을.... 의사라는 직업은 없어질지도 모른다던데, 농구 선수는 안 없어지지 않을까? 일단, 내가 지금 너라면 그냥 신나게 놀거야!”

너무 무책임한 대답이었을까?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조카는 이내 대화를 멈추고 로봇 조립에 몰두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뜨거운 여름. 습하고 더운 바람마저 불지 않을 땐, 잠시 정신을 놓고 앉아 차가운 아이스크림, 시원한 물 한 잔으로 살살 달래 가며 얼른 가을이 오길 기다린다.
힘든 여름이지만, 덕분에 방학이라는 선물 같은 시간을 받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곧 고3이 된다며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 점수에 맞춰 전공을 결정하겠다는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갔지만 방황하고 있는 청년.

“수녀님. 수녀님이 지금의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같은 질문의 횟수가 더해 갈수록 마음은 점점 불편해진다. 뭐라고 해 줘야 하는 걸까?
그러는 나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긴 하는 걸까?

요즘 유행하는 단어인 “4차 산업 혁명”을 들먹이며, 좀 더 넓은 시야를 갖는 것이 좋겠다며, 예전 세대들이 안전하다고 하는 그러나 곧 없어질 거라는 소문에 휩싸인 직업들을 꼽아 가며, 한참 열을 올리다 보니 마음이 불편하다.

만약 직업이라는 것을 고민한다면, 좀 더 창의적이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현실적이란 이야기를 하면서 나 또한 그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그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들을 끌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필요 없고 소용없는 것으로 낙인찍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이제 막 생명력을 꽃피우려 하는 그들에게 도움이 될까?

“영화에서나 보던 세상이 다가오고 있네요. 희망이 없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안정적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라지는 다른 세상이 올 거라는 거잖아요? 수녀님은 생각해 보신 것이 있으신가요?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하죠?”

▲ 하느님은 세상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은총을 밤하늘의 별과 같이 주신다. ⓒ박소연 로사 수녀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가 대신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되었으며, 혜성과 같이 등장한 알파고는 경기 상대를 울리기도 했다. 기계는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는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고 재기 넘치는 광고를 만들기도 한다. 최근에는 미국 IT 기업에서 신용카드와 신분증을 대신하는 생체이식 칩을 직원들의 몸에 심은 것을 두고 여러 의견으로 시끄럽기도 했다.

빠른 변화 안에서 우리는 쉽게 흔들린다. 누군가의 말에 실체 없이 두려워하기도 하고, 벌어지는 현상에 근거를 알아볼 틈 없이 기뻐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 안에서 확실한 한 가지는 우리는 현재 하나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분기점에 있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 동안 이룩되어 온 견고하고 안정된 것들을 부정하고 그저 상상만 했던 것들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시간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이 안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흔들리는 내 자신에게 삶의 방향을 물어오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이라 대답해 주어야 하는 걸까?

그저 이런저런 예상되는 일들, 그에 대한 대비책, 멀리 내다봐야 한다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들은 이제 접어 두고 정말 무엇을 봐야 하는지 생각해 볼 때다.

사실 바뀌는 시대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말로도 우린 그것을 알 수 있다. ‘4차’라는 말이 붙었다는 것은 1, 2, 3차가 있었다는 뜻일 것이며, 그 안의 여러 분기점을 우리의 선조들은 묵묵히 삶으로 잘 적응하며 살아왔다는 뜻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급변하는 시대가 아니라 우리 삶의 태도다.

사람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루에도 수없이 넘나들며 산다. 과거를 놓지 못하며 고스란히 현재로 가져와 마음의 위안을 삼는가 하면, 다가올 미래를 과도하게 걱정하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현재의 불확실함을 누르기도 한다. 과거의 일들을 통한 배울 점과 미래의 전망을 간과하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의식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야 하는 곳은 어디인가? 바로 현재다. 과거에 매몰되거나 미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내가 발을 붙이고 주변인들과 호흡하며 살고 있는 이 자리,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의 삶의 자리에 발을 붙이고 살지 못하는 것은 올바른 미래를 계획하지 못한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과거와 미래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현재를 의식하는 것.
현재에 온전히 존재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의식하며 내게 지금 주어진 것을 하는 것.
사람으로 세상 안에 있는 이유를 고민하며 의미 있다고 느끼는 것을 선택하며 사는 것.
이것이 사람으로 사람답게 현재를 사는 것 아닐까?
어쩌면 먹고 살기 위해, 좀 더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금권주의 세상에서 명예와 권력을 쥐기 위해 잠시 한쪽으로 밀어 놓았던 것들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많은 부분을 이젠 기계가 다 해 버리는 세상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말자.
예전의 선조들이 살아온 시간 안에서 사람을 우선시하려고 했던 노력들을 잊지 않는다면. 사람이기에 하는 자연스러운 것들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긴다면.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는다면.
조금 생소하고 불확실한 미래는 이 시대의 우리가 짊어질 자연스런 십자가로 다가올 것이다.

기계는 발전된 기술로 더욱 기계답게
사람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그대로 더욱 사람답게.
이것이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현재를 살아갈 하나의 열쇠다.

 
 

이지현 수녀(로사)
성심여고에 재직중이다.
청소년에게 삶을 노래하며 행복하게 살도록 돕는 꿈을 꾸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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