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참으로 책임이 무겁다"

"23:00 완전 무장한 폭도가 1만여 명에 달하고 있음.
23:15 전교사 및 전남대 주둔 병력에게 실탄 장전 및 유사시 발포 명령 하달(1인당 20발)

광주 소요가 전날 전 지역으로 확대됨에 따라 마산주둔 해병 1사단 1개 대대를 목포로 이동 예정

(80.5.21 00:20 505)"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집단 발포 전날 밤, 발포 명령을 내린 증거가 나왔다. ‘발포 명령’의 직접적 증거가 나온 것은 37년 만에 처음이다.

5.18기념재단이 24일 공개한 ‘광주 소요 사태(21-57)’라는 제목의 군 기밀 문서는 집단 발포 전날 밤인 21일 자정 작성된 것으로 전투교육사와 전남대 주둔 병력에 실탄 장전과 유사시 발표 명령, 마산 주둔 해병을 목포로 이동시키라는 내용이다. 이 문서는 당시 보안사령부 505보안대(광주지역 관할)가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령에 따라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금남로에서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이날 오전에는 이미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5.18은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 방화, 선동”이며, 이에 대한 자위권을 발동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했지만, 전두환 등 쿠데타 세력은 지금까지 자신들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부인해 왔다.

5.18기념재단 김양래 상임이사는 25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발포명령이라는 말이 적시된 문서가 처음 나온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 상임이사는 “이번 문서가 공개된 경위, 이후의 추가 공개 등은 아직 공식적으로 말할 수 없다”면서도 “군에서 비밀자료를 내놔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한 번도 진정성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뤄 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5.18 진상규명에 대해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이것은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며, “결국 과거에 관련된 사람들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특별조사위원회가 필요하다. 대통령의 의지표명도 국회에 특별법 마련을 요청하는 것이고, 결국 국회의 의지”라고 강조했다.

▲ 1980년 5월 21일 집단 발포 명령을 지시한 기밀문서가 공개됐다. (자료 제공 = 5.18기념재단)
21일 집단 발포에 대해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발포와 관련한 직접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위권 발동을 비롯한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는 군 상층부의 논의구조 및 이 논의에서 자위권 발동문제가 토의됐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를 발굴했다”과 발표한 바 있다.

또 당시 위원회는 “광범위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도청 앞 발포를 직접 명령한 문서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발포 명령계통을 정확하게 설명해 줄 진술을 확보할 수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로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과연 명령을 하달한 최종 책임자는 누구인가라는 중대한 의문이 남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로는 직접 명령자를 밝히기 어렵다. 2007년 국방부 과거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5.18 당시 지휘권 문제는 청문회 당시부터 논란이었던 부분으로 “공수부대가 현지 지휘관인 31사단장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과격진압과 발포를 했다”고 정리했다.

결국 “지휘권이 이원화됐었다는 주장”으로 당시 전교사나 31사단은 19일 광주고등학교 앞의 발포, 공수부대 실탄 분배 등에 대해 보고받거나 허가하지 않았으며, 공수부대도 이들 상급부대에 보고하거나 허가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21일 집단 발포 전날 상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진상규명위원회 결과 보고서를 보면, 과격 진압으로 광주 시민들의 저항이 격렬해지자 육군본부는 제3공수여단을 추가 파병했다. 당시 여단장은 최세창 준장으로 그는 5월 20일 밤 각 대대에 M-16 실탄을 배부하고 장착하도록 지시했다. 최세창 준장은 신군부 쿠데타의 핵심 인물로 대장까지 진급했다.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던 시민군을 군이 유혈진압한 1980년 5월 27일, 당시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이렇게 일기를 썼다.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가 군인들의 잔혹한 진압행위로 인하여 시작된 이 사태는 엄청난 희생을 내고 말았다. 아무리 군인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어떻게 훈련을 시켰길래 이렇듯, 같은 동포에게 잔혹한 행위를 할 수 있는가. 군인들에게 누가 이렇듯 참혹한 행위를 하도록 명령을 내렸을까. 그 사람은 책임이 참으로 무겁다. 데모 진압을 명분으로 전쟁 중에 적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살상행위를 했던 부분은 여러 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김양래 상임이사는 이 일기 내용을 전하면서, “이 내용이 결국 진상규명 이유, 당위성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이영선 신부는, “특별법 제정,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에 동의한다”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모두 죽기 전에,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진실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국민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국가에 당한 원통함을 반드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현재 전두환 씨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가 스스로 변호할수록 세상을 분노하게 만들고 진실을 밝히도록 만든다”면서, “오래 지났고, 민주화운동이 된 상황에서 가해 세력들이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꾸 상처를 건드리니 우리는 소리를 지르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자료는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고, 드러나기를 바란다며, “특히 이런 사건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없어야 한다. 시간이 지났다고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문서 공개에 앞서 1980년 당시 수원 제10전투비행단 소속 전투기 조종사가 5월 21일과 22일 사이 비행단 전체에 (광주)출격 대기 명령이 내려졌으며, 공대지 폭탄을 최대한 장착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공대지 폭탄은 전투기에서 지상으로 떨어뜨리는 폭탄이다.

이 증언과 이번 발포명령 문서 공개로 국회에서는 5.18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보다 빠르게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5.18기념재단 등 오월단체들은 8월 24일, 입장문을 통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방부가 특별조사단을 구성하기로 한 것을 환영하는 한편, 5.18진상규명특별법 제정과 기소권, 조사권 등 법적 강제력을 가진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라고 국회에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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