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옆작은학교의 산 역사, 재양·정희 이모

1998년 작은학교 새 건물이 지어졌을 때 아이들이 그린 벽화. 왼쪽 위 동훈이 삼촌 같기도 하고 길재 삼촌 같기도 한 상쇠가 정희 이모의 그림이다.


1월의 마지막 날, 만석동 기찻길옆작은학교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작은학교 상근자 유동훈 삼촌의 전화다. 작은학교에서는 공동체 식구와 교사를 이모 삼촌이라 부른다.

“형, 동훈인데요. 오늘 인터뷰하기로 했죠? 저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지방엘 다녀와야 해요. 재양이랑 정희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꾸벅꾸벅 졸아가며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만석동 주공아파트 앞에서 내렸다. 기찻길옆작은학교 앞에 서니 늘 보던 벽화가 새삼스럽다. 아이들이 저마다 자기 얼굴을 그렸다는 이 벽화에 오늘 만나 인터뷰하려는 김재양 이모(31세)과 오정희 이모(30세)의 얼굴도 들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1층 공부방에는 아직 방학 중이라 초등부 아이들이 모여 공부를 하고 있다. 동훈이 삼촌의 아내 수연 이모가 창밖의 나를 발견하곤 손가락질로 2층 살림집으로 가라고 알려준다. 2층에는 거기 사는 재양 이모만 있고, 강화 사는 정희 이모는 오는 중이라고 했다. 그날은 <만석신문> 편집 회의도 있어서 강화 사는 심상범 삼촌과 강길재 삼촌도 와 있었다. <만석신문>은 2001년 1월부터 작은학교가 만드는 마을 신문이다. 처음에는 격월로 1번씩 발행했는데 이제는 부정기 발행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지난 기사들은 홈페이지 http://mansuk.saramdl.net에서 볼 수 있다). 정희 이모를 기다리면서 상범이 삼촌과 재양 이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재양 이모가 지난해 4월 정기 발표회 때 이야기를 꺼낸다.

“지난번 영상 작업 때문에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정희와 제가 얘기를 딱 부러지게 하지 못해서 아주 여러 번을 찍어야 했어요. 스무 번도 더 찍었어요. 어찌나 미안하던지.”

우리 이야기를 힘없고 가난한 이웃과 나누기 위해 인형극단을 창단

지난해 4월 정기 발표회는 작은학교 스무 돌 기념 공연이었다. 그래서 작은학교 20년을 돌아보는 영상물을 만들었는데, 그 주인공이 재양 이모와 정희 이모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방에 다니기 시작해 이제 이모로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두 사람이야말로 작은학교의 산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발표회 때 그 영상을 보면서 몇 번이고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재양 이모가 해묵은 인터뷰 때의 어려움을 얘기하는 걸 보니 오늘 인터뷰도 상당히 부담스런 모양이었다. 그래서 녹음하거나 적지 않고 편안하게 인터뷰하려고 마음먹었다. 잠시 뒤 정희 이모가 왔고, 우리는 먼저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지난 1월 11일과 12일, 서울 하자센터에서 있었던 인형극 공연에 대해 물었다. 재양 이모와 정희 이모는 모두 인형극 패로 인형 조작을 맡고 있다.



“성공이었어요. 어디서 그리 많은 분들이 알고 와주셨는지, 정말 고마웠어요. 아이들도 공연 뒤에 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요. 인형극 패 아이들이 가장 밝아지고 자신감이 넘쳐 보이지만, 다른 패 아이들도 자부심을 갖는 게 눈에 보여요. 부천 고강동성당 호인수 신부님이 초청해주셔서 2월 24일 오후 3시에 첫 번째 초청 공연을 해요. 고강동도 저희 만석동이랑 비슷한 형편의 동네라고 들었어요. 유랑극단을 만들어 우리 이야기를 우리처럼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들려주는 게 저희가 인형극단을 만든 목적이니 아주 잘 된 일이죠.”

인형극단을 창단하고 처음으로 유료로 열었던 지난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아이들은 느낌이 전과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정기 발표회는 우리가 준비해서 보세요, 우리 이야기에요, 하면 되지만 이번 공연은 인형극단을 만들고 올린 첫 유료 공연이었잖아요. 아이들도 돈을 받으니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성우를 맡은 아이들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모여서 연습하고 서로 발성을 바로잡아주더라고요.”

기차처럼 거침없이 달려갔으면 하는 꿈을 꾸며 붙였다는 ‘칙칙폭폭’ 이름처럼 기찻길옆작은학교 인형극단은 일단 순조로운 시작을 하는 듯했다.

동네가 사라져도 인형극단을 통해 우리 꿈은 계속 이어질 것

“인형극단을 만들면 만석동 동네가 없어지더라도 계속 만나는 자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전부터 해왔어요. 하지만 인형극단을 서둘러 만든 건 그래야 좋은 공연장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공부방 이름으로 빌리려니까 학예 발표회 수준인 줄 알고 잘 빌려주려고 하질 않더라고요. 춘천 인형극제에 나가더라도 전문 극단이어야지 좋은 공연장을 빌릴 수 있어요. 아니면 천막 극장에서 해야 해요. 인형극단 이름을 뭐로 할 건가 의견이 많았어요. 아이들은 ‘칙칙폭폭’이 촌스럽다고 멋있게 영어 이름을 짓자고도 하고. 그러다가 하자센터 공연 홍보물을 만들면서 얼렁뚱땅 ‘칙칙폭폭’으로 정해졌어요.”

“칙칙폭폭”은 작은학교가 계절마다 한 번씩 내는 소식지 이름이기도 하다. 활자체를 쓰지 않고 직접 쓰고 그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서 후원인과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소식지에는 아이들 글과 이모 삼촌들의 글이 실린다.

작은학교에서 인형극을 시작한 건 1993년부터이다. 처음에 인형극은 아이들이 친구들 앞에서 좀 더 쉽게 자신을 표현하는 놀이로 시작되었다. 공연을 한 것은 1994년 서울에서 열린 빈민문화제 때가 처음이었다. 그 뒤로는 해마다 정기 발표회 때마다 인형극을 공연했다. 다양한 실험 속에서 작은학교 인형극은 발전을 거듭했고, 2006년 처음으로 춘천 아마추어 인형극 경연대회에 나가 특별상을 받았다. 그때 보고 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2007년 공연 때는 처음으로 관절 인형을 이용해 인형극을 공연했다.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같은 작품으로 2007년 춘천 아마추어 인형극 경연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았다. 지금 인형극 패는 4월에 있을 2008년 정기 발표회를 위해 “아기장수 우투리”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 : 기찻길옆작은학교 홈페이지 http://gichagil.saramdl.net


“아기장수 우투리는 몇 년 전 발표회 때 올렸던 작품이에요. 그때는 지금처럼 관절 인형이 아니라 막대 인형이었지만. 이 얘기의 주요 테마는 대결과 좌절된 꿈인데, 여기에 평화 메시지와 우리 이야기를 어떻게 담을 건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2월 안에 어느 정도 연습이 마무리되어야 하는데 아직 시작 단계라 걱정이에요.”

인형극패는 현재 5명의 고등부 아이들과 3명의 이모 삼촌이 인형 조작을 맡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생까지 아이들이 성우를 맡고 있다. 두 명이 한 인형을 조작해야 하기 때문에 호흡을 잘 맞추어야 한다. 목소리를 인형 조작에 맞추어야 하는 성우까지 세 명이 한 사람처럼 움직여야 한다.

“서로 호흡이 맞지 않으면 삐칠 때도 있어요. 그래도 서로 이해하고 믿게 되요. 안 그러면 인형을 조작할 수 없거든요. 성우를 맡은 아이들도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자기 인형을 조작하는 언니 오빠나 이모 삼촌 말은 들어요. 그만큼 어느새 서로 믿고 의지하게 된 거죠. 우연히 시작하게 되고 점점 발전시켜온 인형극이지만 정말 우리 작은학교에 꼭 맞는 것 같아요. 서로 이해하고 호흡을 맞춰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또 인형극에는 노래, 음악, 이야기 등 우리가 보여주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담을 수 있고요.”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작은학교

정희 이모는 지난해 5월에 결혼했다. 2001년부터 작은학교에서 자원 교사로 활동한 박형섭 삼촌(29세)이 신랑이다. 정희 이모 부부는 작은학교가 맺어준 열 번째 부부이다. 그 동안 작은학교를 통해 만나서 부부의 연을 맺은 열 부부 가운데 아홉 부부는 결혼 뒤에도 강화와 만석동에서 모여 살고 있다. 정희 이모 부부는 다른 세 선배 부부와 함께 강화에서 살며 공부방 상근자로 일한다. 작은학교 식구들은 공동체를 지향한다. 매주 화요일 저녁에 스물 예닐곱 명의 식구들이 모여 작은학교 일을 의논한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함께 의논해서 결정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내가 동훈 삼촌에게 막 시작한 인형극단 소개도 할 겸 정희 이모나 재양 이모 가운데 한 명을 인터뷰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도 가족회의에서 함께 의논해보겠다고 했다. 워낙 드러나지 않게 작게 사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지라 거절당하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했다. 다행히 허락은 떨어졌고, 정희 이모와 재양 이모 모두를 인터뷰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처럼 작은 일도 함께 의논해서 결정하는 의사 결정 방식이 작은학교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힘이라 생각된다.

재양 이모는 지난해 겨울 한국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정희 이모는 최근 만화를 배웠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지만 만화는 즐겨보지도 그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위해 한겨레문화센터 출판만화창작학교를 수강했다. 졸업 작품으로 만석동 아이들 얘기를 담은 “비빔밥”을 그렸다. 쑥스러워하는 정희 이모를 대신해서 재양 이모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 식구라서가 아니라 졸업 작품집 중에서 정희 것이 제일 나아요. 작품집을 보고 전문 작가가 함께 일해보자고 제의까지 했다니까요.”

정희 이모뿐 아니라 작은학교 식구들은 재주가 많다. 정기발표회의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하려고 한다. 모르는 것은 배워서 하고 저마다 소질을 살려 모두가 참여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덕분에 아이들도 작은학교에 다니면서 자기 재능을 발견해간다. 요즘 초등부 남자아이들은 동훈이 삼촌과 1주일에 한 번 목공일을 한다. 공부방 책상 하나, 주차 금지 표지판도 만들었고, 예쁜 당나귀 나무 인형 “동키”도 만들었다. 초등부 여자아이들은 재양 이모와 퀼트를 한다. 아이들에게 감수성을 키워주기 위한 활동이다. 이처럼 작은학교에서는 늘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자연스럽다. 말 그대로 ‘작은학교’이다. 재양 이모와 정희 이모는 아이들이 자라서 동훈 삼촌과 함께 직접 인형을 만드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

낮 4시쯤이 되자 2층 살림집에 갑자기 사람들이 부적이기 시작한다. 삼삼오오 마주 앉아 자연스럽게 공부와 발표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더 이상 재양 이모와 정희 이모를 붙잡고 있을 형편이 안 되는 듯했다. 서둘러 인사하고 작은학교를 나서니 동네가 조용하다. 재양 이모와 정희 이모의 말이 생각났다.

“점점 비는 집이 늘고 있어요. 동네에 활기가 사라지고 있고요. 어른들도 계속 돌아가시고요.”

작은학교 식구들은 재개발이 시작돼 동네가 없어지고 사람들이 모두 떠날 때까지 동네를 지킬 것이다. 그러다가 동네가 사라지면 유랑 인형극단 칙칙폭폭를 통해 길동무들을 만나고 동무들과 함께 자신들의 꿈,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박영대 200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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