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8월 27일(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주님은 그분의 사명과 따르는 사람들의 사명이 다른 사람들에게 섬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섬김을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구세주를 알아보고 인정하기

마태오 복음서의 이 구절은 베드로가 대변하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다. 그리고 이 고백이 이방인들의 땅인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태오는 은근하게 이 부분에서,(또한 마르 8,27)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사명이 지닌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고자 한다. 하느님의 아들은 모든 사람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방식의 사랑을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 선언하기 위하여 오고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 16,13)-에 대해 제자들은 사람들이 그분을 예언자로(16,14)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꽤 그럴 듯한 내용의 대답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들의 전통 속에서 자리 잡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의로움의 실천과 하느님의 사랑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산상설교에서 우리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는 소리를 듣는다.

예수님에 관하여 들었고 본 사람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은 훨씬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6,15) 이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할 용기를 가졌다면 놀랄 일이다. 그리스도가 진짜로 우리 삶에 있어 역동적이고 도전하는 중심이 되고 있는가? 베드로의 다음 대답은 단순한 어떤 형식이 아니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그것은 역사에 나타나는 소외되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섬김이라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결정에 근거한 행동을 요구하는 대답이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미지 출처 = Pixabay)

종이며 사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는 권위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맥락 속에 자리한다. 그것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힘이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종이며 사도”(2베드 1,1)라고 부르면서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서로를 섬기라”(1베드 4,10)라고 충고한다. 이사야서도(22,20-23) 똑같은 호소를 우리에게 한다. 엘야킴에게 권력을 주면서 주님은 그에게 “예루살렘 주민들과 유다 집안의 아버지가 되라”(이사 22,21)고 요청한다. 구약에 의하면, 지배자의 사명은 자녀들이 살기를 바라는 사랑스러운 아버지처럼 “의로움과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만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 집안의 열쇠”를 주는 것이(이사 22,22) 타당하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판단은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알아내기 어려운”(로마 11,33) 분의 뜻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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