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8월 6일(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마태 17,1-9

(사진 출처 = pixabay.com)

예수가 산에 올라 빛나는 모습을 두고 대개 예수의 신원에 대해 집중해서 설명한다. 이를테면 예수는 종말론적 메시아요, 그 메시아성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확연히 드러날 것이고 그 전조적 상징으로 거룩한 변모는 이해되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모세와 엘리야는 유다 사회에서 종말론적 인물로 믿어졌는데 지금 베드로의 눈앞에서 예수와 함께 있음으로 예수가 종말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암시한다는 이유가 첫째고, 둘째는 구름이 덮이고 구름 속에서 터져 나온 소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소리는 구약에서 메시아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인데 예수를 가리켜 울려 퍼진 소리라는 이유에서다.

이런 설명은 예수를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것들이다. 문제는 이런 예수를 받아들이는 이의 태도, 다시 말해 베드로를 통해 우리는 메시아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선 자주 소홀히 대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를 통해 메시아는 ‘기다려져 온 것’에 대한 확인 차원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오늘 복음은 분명히 한다. 베드로가 예수의 변모를 보기 좋아하는 것은 모세와 엘리야로 대변되는 유다 사회가 ‘기다려 온’것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다. 말하자면 제 기존 원의와 갈망에서 낯설지 않는 것이 예수, 모세, 엘리야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구름의 등장은 이런 베드로의 기존 인식체계를 뒤흔들어 놓는다. 베드로는 두려워한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베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 어떤 바람도 가질 수 없었다.

예수는 홀로 제자들 눈앞에 등장한다. 메시아란 이런 것이다. 낯설고 낯선 것들 안에, 기존의 관습과 문화와 신념들이 깡그리 사라진 순간에 유일하게 남아 있어야 하는 게 메시아다. 이유인즉 메시아는 ‘조화의 절정’이기 때문이다.(이사 6,11 이하 참조) 이것이다, 라고 되뇌는 것은 저것과의 조화에 얼마간의 낯섦과 불편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모든 낯섦과 불편함을 넘어서는 그곳에 메시아는 홀로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교회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건, 영성과 신학의 지식적, 문화적 축적이 아니라, 영성과 신학이 켜켜이 쌓아 오는 것에 대한 재해석과 비워 냄을 통해서다. 매번 연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교회는 저 보이지 않는 내일을 향해 오늘의 결심과 결정이 과연 인간의 뜻인가, 하느님의 뜻인가를 고민하는 데 그 궁극의 존재 이유가 있다.

하여 이것이다, 외치는 순간에 악마가 끼어들 수 있음을 기억하고, 또 다른 저것이 있음에 대해 늘 열려 있는 자세가 교회의 합당한 자세다. 메시아는 늘 우리가 기대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은 곳에서 홀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실 테니....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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