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7월 30일(연중 제17주일) 마태 13,44-52

오늘 복음 비유에 관련해서 하늘나라는 두 가지 차원을 가진다. 하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보물은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무엇을 가졌든 그것은 보물로 인해 무의미한 것, 혹은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될 뿐이다. 그가 가진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하지 않으면 보물, 곧 하늘나라를 얻을 수 없게 된다. 다른 하나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의 '항구성'이다. 그는 찾아 가는 중이다. 이것이다, 싶을 때 멈추지 않는다. 그는 늘 찾아 나서고, 찾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 찾아 나갈 것이다.

하늘나라의 두 가지 차원은 실은 서로 맞닿아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견지하는 항구적 노력에서 가능하다. 예수가 하느님의 자리를 박차고 떠나온 건, 역사적 사건으로 고정된 인류의 지난 과거사가 아니다. 지금도, 내일도 계속해서 그를 받아들이든 아니든 존재하는 모든 만물과 더불어 예수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떠나올 것이고 떠나옴 자체로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가 된다.

하늘나라가 이렇다 저렇다를 규정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자신은 자신을 떠날 수 있냐고. 스스로의 지적 권력과 양심적 판단, 그리고 정의에 대한 식견조차 내려놓을 수 있냐고, 물어보라. 답하기 쉽지 않은 만큼 우린 적어도 스스로에게 얽매여 있으며 스스로를 대견해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건, 얼마간의 당위성과 얼마간의 합리성마저 버린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얼마간'을 남겨 두는 순간, 우리는 하늘나라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자신은 자신을 떠날 수 있냐고. (이미지 출처 = Pixabay)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양심적, 또한 실천적으로 이것만큼은 안 돼, 라는 것조차 내려놓을 수 있는 자, 그래서 그 어떤 경우에든 모든 걸 비운 채, 있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 그에게 하늘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잘 살고 못 살고는 무엇을 지키고 깨닫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 내는 것, 그것이 가장 잘 사는 게 아닌가.... 우린 살아 내고 있는가, 죽어 가기 위해 사는가. 살아 내는 자는 모든 존재하는 것과의 갈등과 반목 속에서도 살아 있음에 대해, 그것이 설사 자신의 가치와 신념에 맞지 않더라도, 경외와 애착을 가지는 자고, 죽어 가기 위해 사는 자는 살기 위해 켜켜이 쌓아 둔 것에 저당 잡혀 제 자신이 죽은 것도 모르고 살아 있다 외치는 자가 아니든가.

하늘나라는 정신없이, 어떻게든 살아 내는 철부지들의 것이다. 그만, 하늘나라를 이렇다 저렇다 규정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폭행을 그만하라. 그리고 존재함에 대해 묵상하라.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 없이 하늘나라를 논하지 마라.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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