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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한낮 카페에 나타난 백조의 정체[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73]
김혜율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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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28  14: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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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에 잘 마른 하얀 린넨 셔츠가 바삭거린다. 발목까지 오는 짙은 남색 바지의 성긴 올 사이사이로는 바람이 드나든다. 숙녀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셔츠는 자연스레 구겨졌고 바지는 너풀 대며 정강이를 살짝 건드렸다. 그리고 이내 차르르르 단정한 매무새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숙녀는 머리에 지푸라기로 만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모자 둘레를 따라 짙은 회색 리본이 둘러져 있다. 그리고 그녀는 지각 있는 현대 여성이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는 가방을 어깨에 늘어뜨리듯 메고 있다. 이 가방은 물건을 담는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가죽을 얻기 위해 불필요하게 동물을 죽일 필요도 없고, 비윤리적인 노동착취 환경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우며, 독성물질과 거리가 멀고 자연과는 가까워 아무렇게나 방치해도 잘 썩어 문드러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가격이 싸고, 오며 가며 사은품으로도 받을 수 있는데다, 그 단순한 구조로 인해 실과 바늘만 사용할 수 있다면 세 살 먹은 아이부터 백 살 노인까지 두루두루 만들어 쓸 수 있는, 한마디로 아주 흔해 빠진 좋은 가방이었다. 거뭇거뭇한 목화씨가 점점이 박혀 있는 가방은 숙녀분의 소지품을 담아내느라 한껏 불룩해져 있지만 옆구리가 터질까, 손잡이 끈이 떨어질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가방은 천이 톡톡하게 힘이 있는데다 튼튼한 박음질 덕분에 가방을 해체해서 바지를 만들어 입어도 대를 물려줄 만큼 질긴 에코백 출시 초기 모델이기 때문이다.)

딸랑, 카페 문을 열고 숙녀가 들어오자 그녀를 감싸고 있던 후덥지근한 열기는 카페 안 냉기의 맹렬한 공격을 못 버티고 바로 허물어졌다. 때는 마침 정부 어느 부처에서 오전 11시를 기해 폭염주의보 발효를 알리는 재난경보를 준비하던 그렇게 뜨거운 여름날이다. 숙녀는 모자가 시야를 가리는 게 답답했던지 모자를 매만져 챙을 조금 들어올렸다. 모자 아래로 보이는 귀밑 언저리가 땀에 젖어 있다. 숙녀는 케익이 진열된 쇼케이스 쪽으로 다가갔다. 안쪽에 진열된 케익들은 아름답지만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싼 에코백을 맨 숙녀는 잠시 고민하다 격자무늬의 반죽을 올린 통통한 반달 모양의 애플파이 하나를 골랐다. 표면이 갈색으로 그을려 있고 반짝이는 윤기가 감도는 파이였다.

   
▲ 베일 뒤 그는 누구? ⓒ김혜율
“따뜻하게 데워 드릴까요?” 점원이 묻자 그녀는 “네.”하고 짧게 대답했다. “네, 곧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점원은 애플파이가 데워지는 동안 빠른 손놀림으로 투명한 유리잔에 얼음을 퍼 담고 검은색 액체를 부었다. 유리잔 표면에 뽀얗게 물방울이 맺혔다. 점원은 커피와 파이를 담은 쟁반을 숙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조심하세요. 뜨겁습니다.”

아직 점심때가 되려면 이른 시각이라 카페는 한산한 편이다. 이른 오전이지만 여름날의 열기를 피해 카페를 찾아온 손님 몇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로의 날개를 부비고 있는 비둘기 커플이 한 팀, 머리가 희끗하고 동그란 안경을 쓴 올빼미 노신사가 한 분, 귀에 이어폰을 끼고 노트북을 노려보고 있는 갈매기가 두엇, 그리고 오늘도 자식 걱정으로 분주한 사랑앵무 한 쌍이 다였다. 숙녀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넓은 창문가 한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에 커피와 파이가 담긴 쟁반을 놓고 창밖의 분주한 거리를 쳐다보는 그녀는 아마 우아한 백조쯤 되리라.

카페에는 재즈 음악이 흐르고 유리창 너머의 매미들이 ‘쓰르르 쓰르 쓰’ 하는 즉흥연주를 보태고 있다. 이거야말로 여름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시즌 한정 재즈 연주가 아닌가. 백조 같은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유리잔 속 얼음이 짤랑짤랑거렸다. 차가운 유리잔 표면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또르르르 굴러떨러졌다. 그런데 이 숙녀분의 정체는 무엇일까? 비둘기 한 쌍이 그녀를 흘낏거리고 사랑앵무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만 백조는 그저 호수 위를 유유히 헤엄칠 뿐이다. 숙녀는 포크로 파이 귀퉁이를 허물다가 대범하게도 파이를 덩이째 찍어 올렸다. 그대로 베어 물 작정인 것이다. 어머, 그녀이기에, 백조 같은 그녀이기에 이런 모습조차 사랑스럽다.

파삭. 파사사삭. 달콤한 사과잼이 그녀의 혀에 닿는다. 그런데 아악, 악! 악! 아 뜨거! 후후! 하아.... 점원이 뜨겁다더니 정말로 이건 너무 뜨거운데 하고 생각하며 입을 움켜쥐며 고통을 참는 그녀의 입천장은 이미 홀라당 벗겨지고 난 후였다. 81겹의 파이 부스러기를 남색 바지에 수북이 떨어뜨린 채로. 백조가 이럴 리 없다고? 그렇지 않다. 이 숙녀야말로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헤엄을 치면서도 호수 아래 발발거리며 헤엄치는 다리를 숨겨 둔 진정한 백조가 맞다. 그 숙녀는, 정확히는 중간쯤 나이 먹은 중년의 숙녀는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치과에 간 사이 이때다 하고 도망치듯 나온 사람이다. 밀린 원고를 어서 써서 보내야 하는데.... 하면서 노트북도 안 꺼내고 뜨거운 사과파이를 먹다 입이 데여 쩔쩔 매고 있는 불쌍한 아줌마다.

   
▲ 로였네. ⓒ김혜율
아줌마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이렇게 쓰고 본다. ‘오사카 방랑여행기’라고. 육아일기를 쓰고 있지만 여름특집으로 야심 차게 여행일기를 써 볼 작정이다. 얼마 전 그녀는 남편과 단둘이 일본 오사카로 여행을 갔다 왔는데, 여행을 가기 전 시어머니께 메리와 욜라를 맡기면서 여행 목적을 소상히 아뢴 바 있다. (로는 놀러온 막내이모 따라 외갓집에 보냈다.) 그때 남편은 ‘일본 시장조사’를, 나는 ‘취재여행’을 간다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일본어를 읽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까막눈인 내가 무엇을 취재한단 말이냐? 그저 먹고, 자고, 생리현상을 해결하기에도 빠듯한 여행이었으면서도 나는 어떡하든 기억을 짜내 여행기를 써 보려 한다. 원고가 밀려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 ‘어머니, 저 정말로 취재여행 갔다 온 거에요. 그냥 놀러간 거 아니에요.’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려면!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아무런 고민 없이 시작되었다. 남편이 아주 싸게 일본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면서 이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을 거라고 나를 꾀었다. 나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에 언제나 약하기 때문에 ‘그럼 무조건 가자’ 했고 바로 삼 일 뒤 출국이라는 걸 알고 여행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다. 우선 친구에게 자랑을 하는 거다. “친구야, 나 이번에 일본에 여행 가. 남편이랑 둘이.” 친구는 부러워해 준다. “와! 너무 좋겠다. 애들은 어쩌고? ....아하! 너무 잘됐다. 그런데 일본 어디로 가?” “그냥 오사카만 좀 둘러보고 오려고.” “와~ 언제 가는데?” “모레. 좀 이르지? 갑자기 결정한 거라서. 후훗~” “우와~”

친구의 환호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내가 한마디 했다.
“응, 그런데 나 배 타고 간다.”

환호성은 바로 폭소로 바뀌었다. 친구는 내가 통통배나 고깃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는 줄 아는가 보다. 나는 무려 크루즈를 타고 가는데. 아무튼 세 아이를 양가 부모님께 맡겨 두고 부부 둘이서 배 타고 일본에 간다는 상황에 대해 한참 놀려 대던 친구는 어쨌든 잘 갔다 오라고 모처럼의 해외여행이 즐겁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주었다. 나는 그 뒤로 아이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여행 준비를 거의 하지 못했다. 도서관에 가서 가장 작은 포켓사이즈 일본어회화 책을 빌려 여행 가방 속에 던져 넣었을 뿐이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여행 전날까지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여권과 속옷, 양말, 여벌 옷을 부랴부랴 쑤셔 넣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아, 두꺼운 책도 서너 권 넣었는데 그건 여행지에서 아무 쓸모가 없었고 짐만 되었다는 두 사람의 후기가 전해진다. 이번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지.... 하고 생각에 잠기는데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치과 진료 마침. 애들 이는 아무 이상 없대. 지금 그리로 갈게. 오 분 뒤 도착.’

백조부인은 아쉽지만 일어서야 했다.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는 카페를 나와 매미가 우는 뙤약볕 저 속으로 다시 걸어 나가야 한단 말이지. 정말 여름특집을 준비해야 할 판이군.

자, 그래서 지금부터 몇 회가 될지 모르는 여름특집 ‘오사카방랑 여행기’ 시작합니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5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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