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7월 23일(연중 제16주일) 마태 13,24-43

하늘나라의 비유는 예수가 이 지상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 궁극의 가르침이다. 세상의 외곽에 머물며 초월적 위엄에 휩싸인 신이 아니라 이 세상 한가운데 또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신이라는 사실이 하늘나라의 비유 속에 확연히 드러난다.

하늘나라는 무엇보다 사람에 비유된다. 밭 주인, 그는 씨를 뿌리는 것으로 제 소임을 다한다. 하늘나라는 특정 대상이나 개념이 아니라 밭에 씨를 내던진 사람이다. 그가 어쩔 수 없는 건, 가라지를 뿌리고 간 원수고, 그가 도무지 관여할 수 없었던 건, 가라지의 성장이다.

일꾼들은 가라지를 뽑아 버리려 했다. 주인은 그냥 두라고 했다. 밀이 다칠까 봐 그냥 두라고 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성장하는 시간은 인내의 시간이다. 하늘나라를 위해 땀 흘리는 모든 이들은, 신앙인이든 신앙적 가치를 남모르게 지켜 나가는 비신앙인이든, 인내의 덕목을 가져야 한다.

▲ 밀밭 (이미지 출처 = Pixabay)

세상의 것에 숱한 판단들을 들이대며 목소리를 높이(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하늘나라는 당장 실현되어야 할 정의며, 선이며, 평화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하늘나라는 제 판단으로만 움직이고 말하다 보면 정작 자신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정의와 선과 평화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에 민감한 이들의 몫이다.

인내는 자기 검열이나 수련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간혹 만나는 이들 중에, 제 언변과 행동에 극도로 세심한 이들이 있다. 행여 타인에 대해 불온한 모습을 보일까 조심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실은 제 품위와 제 교양에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한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 판단한다. 그들의 생활방식이 부럽기도 하고 때론 존경스럽기 하지만, 가끔씩은 안쓰럽고 속으론 철부지의 단순함이 낫지 않나, 하는 조언마저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늘나라를 위한 인내는 "모르면 약"이라는 논리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밭 주인과 사람들이 자는 동안, 그러니까 전혀 모르는 동안 가라지는 뿌려졌다. 모르는 시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제 의식과 판단이 작동하는, 제 논리가 번뜩이는 것으로 재단하고 규정하는 건, 아무래도 교만의 극치가 아닐까....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으면 내려놓고 비워 내고 그냥 모른다, 하면 될 것 같다. 부자 청년 이야기도 그렇고, 지켜 나가고 다듬어 나가려는 모든 노력, 맞다고 외치는 모든 목소리엔 일정 부분 전체주의적 집착이 도사리고 있음을 고백하는 겸손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필수 덕목이 아닐까 싶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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