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그날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자판 앞에 앉습니다. 마지막 글을 올리고 오랫동안 이러저러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잃어버렸던 10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이유에서지요. 무척 아팠습니다. 무슨 물리적인 병이 생긴 것은 아니나 빈 종이를 바라볼 힘조차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몇 줄 쓰다보면 너무도 그 글들이 나약했기 때문이지요. 희망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어찌보면 물리력을 강제한 폭압적인 압제의 장치보다 교활하게 자본은 매일을 생활하는 개인들에게 무슨 말이든 하려고 나서기 위해서는 생존을 걸라고 다그칩니다.

▲ 1987년 8월, 거제 대우조선 파업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 이석규씨의 사체부검과 임금협상을 거들어 주다 노동법의 대표적 악소조항인 `3자개입' 금지 혐의로 구속된 노무현.



교회와 진화론

올해는 진화론을 발표한 다윈의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척 많은 학회들에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심포지움이나 연구 발표가 성황입니다. 이에 대해 가톨릭 교회나 개신교 등에서는 매우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종은 진화 즉 적응해서 살아남은 종이라는 이론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창조되고 하느님의 형상은 받은 피창조물이라는 가톨릭 교회의 근본적인 믿음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소 생략한 것이 많기는 하지만 이러한 교회의 반발과 상관없이 다윈의 생물학적인 진화론은 발표 후 사회학적인 진화론으로 그야말로 진화합니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스펜서이지요. 스펜서에 의해 이 진화론의 이론은 세계를 향한 제국주의적 확장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셈입니다. 새삼 진화론을 말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의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다윈의 진화론에 강하게 반발하지만 제국주의적 침략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들의 미개한 인종에 대한 살육과 시장의 침탈, 약탈 등에 선교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발행해줍니다. 그 나름 교회가 진화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도 교회는 적자생존의 기가막힌 사회적 이론을 교회의 생존과 발전에 적용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러한 반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수없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제도 교회는 아직도 하느님의 창조질서보다 자본의 진화에 더 관심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교회의 생존이 그 적응에 달렸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화론을 거절하는 일, 사람을 사람으로 돌려놓는 일

지난 일 년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새로운 시대를 경험했습니다. 거대한 자본의 실패와 또 다른 진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CEO 즉 경영마인드를 국가의 운영에 도입해야 한다는 경천동지할 이야기들이 세상에 나돌아도 우리는 무감각했습니다. 그것이 마치 효율을 중시하는 선진적인 그 무엇이라고 믿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이 시간 교회의 한편에서는 우리 교회기관들도 경영 마인드로 운영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CEO의 정치에서 사람은 자원입니다. 자원은 효율적인 자원과 비효율적인 자원으로 나뉘고 그 자원들은 모두 전체 이익을 극대화하는 곳으로 줄달음칩니다. 그들은 총생산의 증가와 총이익의 증가에 관심이 있을 뿐 자원들이 어떻게 배분되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효율적인 자원에 부가 집중되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하게 됩니다.

진화론을 거절하는 것은 창조론의 변증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고 버럭버럭 소리쳐보아도 그렇게 해서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가 복원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돌려놓는 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으로 만드는 일, 그리고 사람을 얻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일, 이것이 진화론을 거절하고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 옷 살 돈이 없어서 사법연수생 시절 매일 점퍼만 입고 다녔다는 노무현님. 명석한 두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어서 인문계에 진학하지 못하고 부산상고 어렵게 졸업하고.. 독학으로 고시공부해서 합격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점퍼 차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참혹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지난 이틀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정책을 지지했다거나 그래서가 아닙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 중에는 참으로 매력적인 사진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사법연수원 시절 찍은 사진입니다. 몇 동기생과 찍은 사진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점퍼 차림이었습니다. 이 사진이 노무현 대통령의 모든 삶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시대 진화하는 자본과 그것을 지켜가려는 모든 허위적 질서에 대해 거부해왔습니다. 비록 막혀서 내쳐지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그는 다시 일어나 그 질서에 도전해 왔습니다. 이러한 그가 자신의 무기로 가진 것은 역사와 사람에 대한 믿음뿐이었습니다. 그는 함께 일했던 사회 운동권에서도 비주류였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그를 대통령으로 존중해준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역시 지나간 시대의 권위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분명 그가 바라본 세상은 사람이 중심인 세상이었습니다. 그는 제동장치 없는 사회적 진화에 거의 유일하게 맞선 권력 없는 권력자였습니다. 그를 따르고 지지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장삼이사들입니다.

아마 교회도 언젠가는 또 한 번의 고백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용산에서 무참히 죽어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고, 폭주하는 자본의 논리에 우리를 지키기 위해 급급했으며, 권력이 원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입 다물었다. 광장이 막혔어도 모른 척 제사를 지냈으며 시민이 피를 흘려도 애써 외면했다. 우리는 그 날 한 의로운 자가 죽음을 선택할 때까지 아무 위로도 주지 않았으며, 침묵함으로써 권력에 면죄부를 발행해 주었다. 우리는 그 날 위정자들의 거짓에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눈물어린 고백은 다시 하느님의 사람들이 교회를 찾자마자 안개 걷히듯 사라지고, 제도의 존속을 위하여 새로운 진화의 적자들과 낮은 속삭임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권력과 기득권을 지향하는 자들의 뼈 속 깊이 담겨진 진화론의 본질이기 때문이며, 그래도 그날 교회는 진화론을 인정할 수 없다고 목소리 높일 것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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