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교회-김유철] 5월 24일자 2648호 <가톨릭신문>과 1019호 <평화신문>

 


주말에 집 이사하느라 금요일 오전부터 현재까지 인터넷은 아직 연결안되고
집에는 TV가 없어 세상소식은 안들려 적막한데
FM라디오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와 나의 귀가 풍요롭던 어제 오전
싱크대 고치러온 아저씨가 하는 말
"무현이가 불쌍해서 미치겠심더, 아! 죽겠으예"라고 지나가는 말로 한다.
나는 '무현이'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는 줄 알고
"얼마 안살고 나올깁니더. 너무 걱정마이소"라고 하니
이 양반이 돌았나 하는 눈으로
"사장님, 그기아이고 노통이 죽었으예, 자살했는데 여직 그걸 모릅니꺼?" 한다....
...........그가 갔다...................그가... 갔다...

자정넘어 후배와 같이 봉하마을로 갔다.
그가 사진에 검은 띠를 동여맨 것이 아니라 여덟 팔자로 맨채 나를 맞이했다...
무신 이런 일이 다 있노. 이건 아이다. 이건 정말 아니라고...
슬프구나. 그에게 미안하구나. 또 우리는 진거다.

"사람이 저기가네"라는 그의 마지막 말이 하루종일 윙윙거린다.

이번 주 <언론과 교회> 겨우 적었다.
-김유철 두손모음..

 

5‧18 민주화운동의 기념햇수가 어즈버 29년이다. 남도말로 참 징한 세월이 지나간다. 그 날을 전후하여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모진 시련을 겪은 후유증으로 죽거나 세대몰락을 거듭한 사람들과 살아서도 결코 그 날의 아픔과 욕됨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29년이 그리 오래된 시간은 아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광주사태’는 ‘5-18민주화운동’으로, 폭도와 부화뇌동자라 불린 사람들은 ‘민주화 유공자’로, 망월동 공동묘지는 ‘국립묘지’로 이름을 달리 했지만 그것은 외피의 바꿈일 뿐 아직도 남도 땅 광주에서는 5-18을 노래한 가수 정태춘의 ‘붉은 꽃’을 여전히 어디에도 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아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교구장 최창무 대주교 주례로 광주 남동 5‧18기념성당에서 기념미사를 봉헌했으며,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서울 용산 철거민 화재 참사현장에서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와 함께 5‧18 민주화운동 29주년 기념미사를 각각 5월 18일 봉헌했다. <가톨릭신문>은 이 내용을 2면 2단기사로 전달했고, <평화신문>은 29면 3단 박스기사로 5월 24일자에 보도했다.

29년 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 표현할 수 없는 참극이 벌어진 이유와 그 이후의 진행과정에 대해서 한국천주교회는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 수많은 말이 넘쳐나기도 했거니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청문회를 비롯한 각종 조사에도 불구하고 발포 책임자 등을 밝혀내지 못한 ‘시대상황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당시 ‘광주’와 관련하여 혹독한 일을 겪은 당사자들 안에는 다수의 천주교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요동치던 시절 정권을 잡기 위한 신군부의 용의주도한 일을 교회와 교회언론이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말할 정보력도 없었고, 말할 용기도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시계추를 29년 전으로 돌려 당시의 유일한 교계신문이었던 <가톨릭신문>을 다시보자. 하나 전제하고 볼 것은 <가톨릭신문>을 비롯한 당시 어떤 언론도 ‘광주’를 제대로 전할 수 없었던 것을 인정한다. 그만큼 ‘반란 및 내란종사자’(1996년 재판에서의 죄명)들이 다스리는 야만의 시절이었다. 모든 언론이 검열을 당했던 당시의 신문에게는 최악의 조건임을 감안한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계신문의 논점은 민망 그 자체였다.

광주학살이 펼쳐진 지 2주 후 1980년 6월 1일자 1207호 <가톨릭신문>은 조심스럽게 광주를 지면에 올렸다. 그때 기사를 지금 다시 보면 눈물이 난다. 아니 차라리 웃음이 난다. “광주 성직자 ‧ 수도자 전원 무사”. (1면 사이드 톱) 부끄러울 뿐이다. 당시에 세상은 사망자가 이백 명인지 이천 명인지, 심지어 일부에서는 수만 명이라고 호곡소리가 그치지 않는 곳을 보도하는 일성이 “패밀리는 죽지 않았다!”일 수는 없는 것이다. 평신도는 ‘패밀리’가 아니란 말이었을까? 교계신문의 관점은 지나친 편협이거나 보신주의의 전형이다.

그로부터 석 달이 채 지나기 전인 8월 31일자 1219호 1면 톱에 전두환 국가보위 비상대책위 상임위원장이란 긴 직책을 가진 사람이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제일성으로 말한 “사심 없이 주어진 책무완수”란 기사가 실린다. 일주일 후 9월 7일자 1220호 1면 톱도 이어진다. “민주복지국가건설에 총력다짐”. 특이할 때 나오는 교회언론의 대단한 파이팅이다.

같은 날 2면에 실린 사설 “민주 ‧ 복지 ‧ 정의의 나라 - 전두환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새 국가원수로 취임하게 된 것을 온 국민과 더불어 경하해 마지않으며 새 영도자를 중심으로 미래의 민족과 조국의 영광을 위해 새 역사의 장을 펼쳐가게 된 우리 국민은 이제 안정과 번영과 희망에 부풀어 있다.”로 써내려간 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놀랍게도 이런 기사를 당당히 실었던 <가톨릭신문>의 당시 사장은 이후 공교롭게도 국가보위 입법위원이 된다. 일제강점기 등 지난 세월의 질곡마다 한국천주교회의 공식기관지인 <경향잡지>가 이런 이상한 순발력의 선두에 있었음은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보고 배운다더니 역사가 비극인가, 교회언론이 비극인가?

그러나 어려웠던 시절은 누구나 최선은 아니지만 힘들게 차선을 택했다고 애써 인정하고 싶다. 29년 전 신문을 이제 와서 모니터 비평할 마음도 없다. 그 이후 우리는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의 강요나 검열도 없이 거침없이 ‘복음적’인 눈으로 교계신문들은 보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두 개의 교계신문들은 2009년판 광주를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가? 아, 이제는 어디에도 광주는 없다고? 그 때나 이때나 교회의 ‘패밀리’는 아니지만 여전히 ‘폭도’라 불리는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배움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며, 예수 없이 교계신문은 더욱이 없는 것이다. 예수 역시 ‘패밀리’는 아니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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