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가 더 낫다"

(빌 태뮤스)

그리스도교-하지만 특히 가톨릭교회-에 대한 계속되는 비판은 그리스도교가 여러모로 봐서 가부장적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교황과 함께 모여 있는 추기경단의 사진을 아무거나 하나 보라. 남성 지배가 당혹스러울 만큼 뚜렷이 나타난다. 여성 추기경을 두는 것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말이다.

교회는 남성 클럽이라는 이 이미지는 가톨릭 사제가 “아버지”(Father, 신부)라고 불릴 때마다 잘 눈에 안 띄면서도 실효 있게 강화된다. 아, 나는 물론 사제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고, 또 사제들이 하는 감독자 역할을 멋지게 인격화한 용어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마침 이달에 우리는 아버지의 날(6월 셋째 주 일요일)을 지내는데, 가톨릭 신자들이 이러한 관행을 재고할 좋은 때일 수 있다.

가톨릭교회는 성직자에게 독신을 의무로 하기 때문에, 사제들은 나처럼 아버지가 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내게는 혈연으로 친족인 두 성인 여성이 있는데, 내 정자와 그들 어머니의 난자가 기적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네 성인에게 양부이기도 한데,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 관계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의 관계가 물리적 태생이 아닌 사랑을 통해 영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여섯 사람 가운데 나를 “아버지”(Father)라고 부르는 이는 하나도 없다. 나는 “아빠”(Dad)이거나 “빌”(Bill), 또는 “여보세요, 당신”(Hey, you)이다. 그리고 손주들 여덟은 내게 다양한 이름들을 붙이는데, 그중에 “할아버지”(Grandfather)는 하나도 없고, 내가 아무리 가르쳐도 “각하”(Your Grace)라고 부르는 놈도 하나 없다.)

그러므로 사제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독신에 대한 교회 가르침과 야릇한 긴장 상태에 있는 듯한 은유를 쓰는 셈이다. 게다가 이는 여성을 사제로 서품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똑-똑-똑 하는 암시다. 이와 대조적으로, 감독교회(미국 성공회)는 40년 전에 여성을 사제로 서품하기 시작했는데, 여성 사제들은 “어머니”(Mother)로 불리곤 한다. (이 호칭은) 감독교회 안에서 사제직이 여전히 남성들에게 지배되고 있다는 지속적인 현실에 대해 적어도 조금이나마 균형을 맞추는 의미도 있다.

▲ 3월 17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사제들이 미사 드리고 있다. (이미지 출처 = NCR)

나는 사제를 “아버지”라 부르는 가톨릭의 관행이 교회문화 안에 깊이 새겨 있으며 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런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뜨게 해 주고 심지어 해방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자기 자신이 그런 칭호를 벗어나면 기뻐할 사제들이 여기저기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본당 신자들에게 자기를 “아버지”가 아닌 다른 말로 불러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대담한 본당사제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뭐라고 부를 것인가?

어떤 영역에서든 어떤 이들에게 붙는 칭호는 그들이 하는 의무에 대해 뭔가를 말한다. “장군”, “교수”, 또는 “의사”. 그런 칭호는 아주 쓸모 있고 그리스도교 역사의 많은 부분에서 제대로 쓰여 왔다. 예를 들어 “목자”(Pastor, 또는 사목자, 사목). 특히 루터교인이나 침례교인들은 자기네 목사를 “콜린스 목자”나 더 비공식적으로는 “짐 목자”(Jim은 James를 짧게 부르는 애칭)라고도 부르곤 한다. 그렇게 통한다.

물론 가톨릭 사제든 개신교 목사든 “존경하올”(Reverend)라는 호칭이 쓰이고, 때때로 개신교인들도 자기네 목자를 이 칭호를 써 부르곤 한다. “존경하올 헤일리 님, 이 모임을 기도로 시작해 주시겠습니까?”라고 할 때처럼. (한국어에서는 대개 “헤일리 목사님”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존경하올”이라고 부르는 것은 때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또한 딱딱한 높임의 뜻도 있어서, 일부 목자들에게는 이 칭호가 “여보세요, 목사”(Hey Rev.)로 짧게 되는 이유다.

하지만 목자(Pastor)는 더욱 사목적이다. 어떤 교역자에게 이 칭호를 붙여 쓸 때마다, 이 칭호는 그 또는 그녀에게 자신이 받은 핵심 과제가 무엇인지 상기시켜 준다. 교회 회중은 사목적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깨진 관계를 치유하도록 돕거나 고통을 이겨내도록 돕거나 간에. 이 칭호는 “아버지”(Father)보다 더 부드럽고 더 겸손하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이 호칭이 붙는 이가 권위를 지니고 있고 또 다른 이는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함의도 같이 담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전통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Father)로 불러온 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 보자. 장로교인인 나의 (사제 칭호에 관한) 생각은 "가톨릭-사제-칭호 게임"이라는 멋진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물론, 이것을 듣고 그냥 흘려버리는 것도 여러분의 자유다. 하지만 나는 사제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문제는 이제는 드러내서 그런 칭호가 여전히 유용한 목적에 봉사하고 있는지 검토해야 할, 잘 도전받지 않는 여러 관행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추신: 나는 우리 교회 목자들을 보통 그냥 폴, 크리스틴이라고 이름만 부른다.

(빌 태뮤스는 장로교 장로이며, 여러 매체에 종교에 관한 칼럼을 쓰고 있다.)

기사 원문: https://www.ncronline.org/blogs/small-c-catholic/maybe-its-time-reconsider-calling-priests-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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