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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실래요[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72]

‘그냥 당신을 안아 줄게요’ 하는 ‘프리허그(Free Hug)’처럼 ‘당신의 이야기를 얼마든지! 들어 드리지요.’ 하는 ‘프리고막 (Free Listen)’이라는 것도 있다면 좋겠다. 한데 말이라는 게 길어지게 마련이라 한 사람의 고막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기다리는 법이 없도록 프리고막센터가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곳엔 다양한 고막 사람이 있어서 누구나 마음 편히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상대를 고를 수 있다. 고막 사람은 인종도 성별도 나이도 외모도 제각각이다. 심지어 최적화된 듣기 반응이 프로그래밍된 인공지능 고막도 있다. 음, 하지만 인공지능 고막이 눈물까지 흘릴 수 있을까. 약간 짭짤한 맛이 나는 진짜 눈물 말이다. 바둑계에서는 알파고가 인간을 누르고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해도 고막계에서는 다소 밀린다는 평을 받을 것 같다. 어쨌든 인공지능 고막 포함 이들 고막 사람은 ‘잘 듣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그들은 자기가 맡은 언어에 능통함은 물론(비속어, 은어, 신조어, 고어, 창조적 욕설까지 아우른다) 화자가 속한 사회, 문화적 배경까지 꿰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이 대단한 점은 남의 말을 들어 주는 대가로 돈이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속에 담긴 희노애락의 감정을 나누어 가지는 데 동의했다는 점이다. 고막 사람은 이야기를 하는 나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준다. 같이 웃고 울어 준다. 하지만 추임새를 넘어선 조언 따위는 하지 않는다. 선과 악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않는다. 이야기의 주제가 이야기하는 사람 마음이듯 결론 또한 그 사람의 몫이다. 때문에 고막센터에서 하는 이야기가 설령 고해의 형태를 띠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고 사제로부터 보속을 받는 고해성사와도 다르다. 그곳에서는 내 이야기를 그냥 들어 주는 이가 있을 뿐이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건 어떨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말은 특정한 감정의 깊이를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빈약하므로 자꾸 반복해서 말하는 것으로 감정을 해소할 수 있다는 걸 고막 사람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이야기는 단 몇 시간으로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며칠을 지나 몇 달, 몇 년이 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네 어머니들이 대개 그러하지 않을까? 그래서 고막센터 근처 숙소엔 나의 친정엄마를 비롯해 시어머니도 묵고 계신다. 두꺼운 책 한 권은 족히 되는 당신들의 인생담을 들어 주기에 내 고막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 같아 내가 두 분 어머니를 이곳 고막센터까지 모시고 온 것이다. 입소문은 무섭다. SNS는 또 어떻고. 순식간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고막센터 주변엔 숙소와 식당이 늘어나고 급기야 관광업이 활발해지는 건 시간 문제다. 인구가 늘어나고 지역 내 고용창출이 일어난다. 무형의 변화는 더 놀라운데, 바로 사람들 가슴에 쌓인 화병이 싹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많은 신경정신과 병원이 문을 닫을 것이다. 부모 자식 간이나 부부간, 고부간, 직장 내, 집단 간 갈등이 줄어들며 여혐이니 남혐이니 하는 서로를 무작정 미워하는 말도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 모든 걸 털어낸 뒤의 마음은 환하고 가벼워서 다투는 그 모든 것이 쓸데없다. 고막의 진동, 미세한 떨림 하나로 가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는데, 그럼 이쯤에서 우리 서로에게 ‘프리고막’이 되어 주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 '당신의 이야기를 얼마든지 들어 드리지요' 하는 프리고막이라는 것도 있다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하지만 단박에 그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무한정 들어 주기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남한테 하는 것도 어려운 처지다. 프리고막이라니? 아니, 왜? 내가 왜? 무엇보다 돈을 벌어야 하는 걸?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당신과 나의 이야기라는 건 그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한 것도 급할 것도 없거든. 하물며 그 이야기가 시시콜콜하고 무익한 것이라면 더 듣고 싶지 않아,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 그래서 아직까지 세상에는 그 누구를 위한 ‘프리고막’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고 앞으로 생겨나리라는 가망도 없는 것 같다. 뭐, 그래도 하는 수 없다. 그건 순전한 이상향이었으니까. 대신 우리에게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 주기 위한 최선의 상대가 있지 않나. 우리 곁의 친구와 이웃 말이다. 다만 한 가지, 그들과의 관계 지속을 위해서는 일방적이기보다는 주고받는 점이 중요하다는 점만 신경 쓰면 된다. 이야기를 할 때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반대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적극적인 반응이 필수다. 일종의 물물교환처럼 이야기 교환을 하는 셈이다.

사실 요즘의 나는 프리고막보다는 사려 깊은 친구나 이웃이 더 좋다. 더 고맙다. 그들은 우매한 나를 보고만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구제해 주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깨달음과 감동을 아낌없이 나눠 주면서. 특히나 그 친구가 나와 같은 여자이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말 다 했다. 바로 오늘 나는 아주 운이 좋게도 아이를 셋 낳은 여인을 만났다. 욜라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아침이면 종종 만나곤 했던 여인. 그녀는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선캡을 애용하는 고전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시 나보다 연배가 위였다. 유치원에 다니는 일곱 살 늦둥이 아들 위로 대학 다니는 아들이 둘이 더 있다 했다. 유치원 마당에서 놀고 있는 로를 보면서 우리는 같은 종류의 미소를 지었다.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엄마 미소’가 그것이다. 통하는 게 있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흔히 그렇듯 이야기는 대개 육아에 대한 것이다. ‘육아 전쟁’, ‘육아 쇼크’, ‘육아의 성공과 실패’, ‘어제의 육아와 오늘의 육아, 그리고 내일의 육아’까지 육아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나는 신세 한탄을 하는 데 선수다. 누가누가 더 힘든가 하는 대회에 출전한 선수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실컷 죽는 소리를 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내공이 상당한 엄마 앞에서는 그것도 구차한 것 같아서 조금 기가 죽는다. 그리고 내게 한 수 가르쳐 주십사 아예 엎드리고 들어간다. 무엇보다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 주위의 삶의 모습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딱 정해진 정답은 없고 어쩌면 나도 옳을 수 있구나 하는 위안을 받는다. 나는 아예 상담 창구에 선 고객처럼 그녀에게 조언을 구했다. 내가 묻고 그녀가 답하는 식이다.

   
▲ 로와 토끼. ⓒ김혜율
“아이들은 참 엄마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요.... 휴. 까다롭고 예민한데다 고집도 세서 진짜 힘든데요, 이걸 어찌 감당해야 할지요?”
역시나 내공 강한 그녀는 그 정도 사안은 기본이라는 듯 담담하게 대꾸한다.
“그렇죠. 그런데 결국은 엄마 기준이 아니라 아이한테 맞춰 줘야 하는 것 같아요. 아이가 하고 싶어 하면 하게 해 주고, 하기 싫어 하면.... 굳이 하라고 할 필요가 없죠. 지나고 보면 그렇더라고요. ” 특별할 것 없는 말인데도 그녀가 하니 다르다. 나는 새로 깨달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너무 애쓸 것 없어. 내 아이를 좀 더 이해하자. 그렇게 아이의 감정과 생각을 존중해 주다 보면 결국 나도 편해진다는 거구나.

그럼 이건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아이를 키우는 건 너무 힘들어요. 엄마가 많은 걸 희생해야 한다는 점에서요. 아이가 어릴 때는 당연하다지만....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죠? 지금 막내가 세 살인데.... 아이가 몇 살쯤 돼야 자유로워질까요?” 굉장한 우문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아들을 성인으로 키워 낸 그녀의 생각이 듣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는 말이 없다. 내게 어디 한번 맞춰 보겠냐는 표정이다. 아, 퀴즈로군. 그럼, 어디 한번 맞춰 볼까.

“음, 여섯 살쯤은 돼야 하죠? 그때쯤이면 제 스스로 하는 것도 많아지고.... 말도 좀 통할 테니까요.”
그런데 그녀는 깜짝 놀라며 그럴 리가?! 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 하하. 그렇죠, 여섯 살은 아직 어리죠. 둘째가 여섯 살인데 제가 이러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초등학교 저학년은 지나야 되는 거죠?”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앞으로 막내 로를 그때까지 키우려면 대체 몇 년 남은 건지 계산을 하다가 그만 아찔해져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틀렸나 보다. 그녀는 과연 그럴까요? 하며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서 있다. 에라 모르겠다. 이번에는 틀리려야 틀릴 수 없게 과감하게 말해 보자.

“하긴 아이가 학교 다니는 내내 엄마 손이 필요하겠네요. 아이가 대학에는 들어가야 된다는 말씀이죠?아이고,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엄마는 내내 바쁜 거군요.” 했더니 그녀는 어찌된 일인지 아까의 미소가 한층 더 심해지더니 부처님이 다 됐다. 그녀가 드디어 한마디를 한다.
“남편을 보세요.”
남편이 왜 나오지? 혹시 난센스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게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남편 챙기는 일이 언. 제. 끝. 이. 나던가요?”
“끝 안 나죠. 아, 아니! 그 말은....!”
그녀가 후훗 하고 웃고 있다. 그녀 말대로라면?

젠장. 이번 생은 틀렸다. 자유로워지려면 아무래도 다시 태어나야만 하나 보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한 저 세 살배기 아이가 여섯 살이 되고 초등학교에 다니고 대학생이 되고 더 큰 어른이 되도록 변함없이 엄마일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이들을 위해 마음이 즐겁기도 하고 아프기도 할 것이다. 대체 그 세월을 내가 어찌 잘 견딜 수 있을까. 우리 어머니들처럼, 아니 그 반만이라도 해낼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느라 얼얼한 얼굴로 서 있자니 그녀가 이젠 집에 들어가 봐야 된단다. 어젯밤 술 처먹고 들어와 자고 있는 아들과 아들 친구들을 위해 술국을 끓여 주러 간단다. 막내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다시 큰아들 술국을 끓여 주러 가는 그녀는 ‘거 봐요, 끝이 없죠?’ 하며 웃었다. 나도 네, 정말 그렇네요.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런데 거참, 이를 어째 하고 연민의 눈길로 쳐다보는 나와는 아랑곳없이 뒤돌아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워 보인다. 아니, 저건 또 왜 그런 거지? 모르겠다. 모르겠어. 나는 암만 요령을 부려도 그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만 그녀만큼의 지혜와 마음의 여유를 얻으려면 필경 그 세월을 다 감당하는 수밖에는 없구나 싶어 마음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5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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