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바라보며

한 편에서는 자연스럽게 죽어갈 목숨도 억지로 살릴 정도로 생물학적인 생명에는 목숨을 걸고 다른 한 편에서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생명도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삼아 죽은 목숨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 삶과 죽음이 도착된 우리 사회이다.

선이 도착이 되면 악이 되고 악이 도착이 되면 선이 된다. 사랑이 도착이 되면 지배가 되고, 지배가 도착이 되면 사랑이 된다. 삶이 도착되어 죽음이 되고 죽음이 도착되어 삶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삶과 죽음에서 얼마나 도착되었는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살아서 노무현은 조롱과 멸시와 모멸의 대상이었다

그는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그는 살아있는 권력에 의해서 끊이없이 조롱과 멸시, 모멸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그의 ‘죄’와 그 ‘경중’에 상관없이 그는 날마다 조중동을 필두로 한 보수언론에 온 가족과 함께 발가벗겨졌다. 조선일보의 가장 경망스러운 만평조차도 검찰이 범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방네 약장수처럼 떠들고 다닌다고 타박할 정도였다.

더 나아가 그는 범죄자로서도 대통령 취급을 받지 못했다. ‘고작’ 수십억 해먹었다. 쩨쩨하게 ‘마누라 핑계’나 대고 더 이상 받은 것은 없다고 말을 하는 날, 검찰 주변에서 ‘1억 짜리’ 시계 받았다고 폭로가 나와 개망신 당했다. 살아있는 권력과 조중동은 그를 큰 범죄인으로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범죄자이지만 ‘국가 변란’과 같은 대통령‘급’이나 꾸는 무시무시한 범죄자이기에 역시 ‘대통령’감‘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는 지난 6개월간 끊임없이 검찰 방송국이 날마다 떠들어대는 쫀쫀하고 비겁한 모리배에 지나지 않는 취급을 받았다.

그는 이미 대통령으로서는 사망 선고를 받았고, 계속 살아있었다면 그는 아마 감방에 갔을 것이고 그는 더 이상 형식적으로도 대통령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설적이게도, 도착적이게도 그것이 유일하게 그가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검찰은 그에 대한 조사의 종결을 선언하였으며, 그를 꼬챙이에 꽂힌 개구리처럼 취급하던 조중동을 필두로 한 모든 언론들이 ‘서거’라는 단어를 쓰며 애도의 사설을 쓰고 있다. 말할 가치도 없는 한나라당은 빼더라도,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노무현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그 거리를 될 수 있는 한 멀리하려고 하던 민주당은 스스로가 ‘상주’라고 표현하였다. 살아있을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계없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던 사람들이 갑자기 ‘상주’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가장 윤리적인 척하는 이 작태들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전도시키는 가장 도착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서울광장으로 향하는 모든 출구와 입구를 경찰이 봉쇄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던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고 있다.

가장 ‘도착적’인 인간은 역시 이명박

물론 이중에서 가장 ‘도착적’인 인간은 역시 이명박이다. 겉으로는 애도를 한다고 하고 국가원수로서의 예우를 다하라고 하였지만 일반시민들이 서울시내에서 추모행사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종로, 시청, 광화문, 대학로 일대를 경찰차로 완전 봉쇄하였으니 말이다. 가뜩 서울도심 집회금지니 뭐니 하며 온갖 조치를 다 취해놨는데 그게 무너지고 다시 촛불이 타오를까봐 사람의 추모조차 금지시키고 있다.

사람이 도착되면 짐승이 된다는 것의 훌륭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와중에 가장 ‘윤리적’인 사람은 오히려 조갑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끝까지 ‘서거’가 아닌 ‘자살’을 써야한다며 노무현의 죽음으로 남상국 사장의 자살도 종결될 수 있다고 썼다. 그가 유일하게 도착에 빠지지 않고 자기 윤리를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인간의 윤리가 아닌 짐승의 윤리로서 말이다.

우린 이렇게 삶과 죽음이 도착된 시대를 살고 있다. 살아있는 것들은 언제 나락으로 떨어져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될지 몰라 공포에 벌벌 떨어야하고 죽어서야 겨우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세상 말이다. 물론 죽어서도 예우의 ‘예’자도 못받는 사람들도 있다. 잘나가는 특목고에서 매번 1등을 하다 5등을 한 다음에 부모로부터 야단맞는 것이 두렵고 스스로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 말이다. 그 아이들이 떨어진 자리는 소문나면 아파트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수돗물에 의해 재빠르게 치워지고 흙으로 덮어진다. 이 아이는 살아서도 죽은 존재였지만 죽어서는 아예 존재 자체가 완전히 지워져버린다. 한 학생의 말처럼 이 세상은 ‘살아있는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인 셈이다.

▲ 시민들이 마련한 빈소에 국화꽃을 들고 조문하려고 길게 줄을 서 있는 시민들. 조문객이 너무 많아서 덕수궁 돌담 길 앞에는 간이 분향소가 여럿 마련되었는데,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절을 올리는 형국이었다. 정부에선 '전임대통령으로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라'고 말하면서 전국에 공식분향소를 실내에 설치하고 생색만 내고 있는 형편이다.

조중동과 이명박은 노무현을 갖고 노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도착은 변해야하는 지점에서 변하지 않는 것, 변화한 것을 변화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치 여전히 그것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무현은 죽은 권력이다. 나는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죄를 지었더라도 전직 대통령이니, 혹은 죽은 권력이니 처벌을 받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조중동과 이명박은 노무현을 처벌하는 것에는 오히려 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조중동과 이명박은 노무현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갖고 노는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조중동과 이명박은 그들의 실책과 잘못을 가리기 위해, 마치 노무현이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인 것처럼(그들은 노무현이 죽었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죽었으되 그를 완전히 죽여야지만 우리 사회가 가능한 것처럼 그를 검찰이라는 하급권력을 통하여 ‘갖고 놀았다’. 따라서 노무현은 봉하마을로 내려갔지만 그들은 그를 끊임없이 서울(신문이라는 지면으로, 혹은 검찰청으로)로 소환했어야만 했다. 그것이 죽은 권력을 가지고 정의를 세우며 살아있는 권력을 보호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치게 갖고 놀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들의 도착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살아남기 위해 죽음이라는 도착적 선택을 택하였다. 도착에 도착이 부딪쳤다. 이 죽음 앞에서 살아있는 권력은 잠시나마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죽은 권력에 빌붙어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던 살아있는 권력이 이제 그 ‘숙주’를 잃어버린 것이다. 숙주를 잃어버린 기생충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 청계광장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다. 청계광장을 경찰버스로 삥 둘러치고, 천변까지 경찰력으로 차단했다. 이명박 정부와 경찰이 느끼는 두려움은 예상을 넘어서는 것 같다.

숙주를 잃어버린 비겁한 정권은 무엇을 선택할까?

프로이드에 따르면 인간은 애도 이후에 비로소 다시 독립할 수 있다. 도착에서의 극복은 애도 이후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인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실연을 당한 후에 애도를 통해서 죽은 사랑을 장사지내고 나서야 새로운 사랑을 찾을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은 지배가 되거나 스토킹이 되고 만다. 살아있는 권력도 이를 아는지 애도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살아있는 권력은 죽은 권력에 의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한다. 진정한 애도를 통해서 혼자 살아갈 성충으로 거듭나야할 것이다. 그런데 이 비겁한 권력이 과연 그렇게 스스로 살 길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비겁하게 또 다시 죽은 권력을 하나 더 찾아내서 그를 조롱하고 멸시할 것인가? 아마 후자가 될 것이다. 이 정부가 ‘의리도 예의도 없는’ 정부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집권 이후 그가 내놓은 거의 모든 정책에 대해 길거리든 토론회든 어디에서건 반대한다고 외쳤지만 우리 세대에게 애증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정치인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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