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수녀님, 마음이 이상해요.”

1교시 수업 준비로 바쁜 아침 시간. 갑자기 찾아온 한 학생이 펑펑 웁니다.
평소에 발랄하던 아이라 놀란 마음에 할 수 있는 것은 등을 두드려 주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일 있었니? 어디가 아픈 거니?”

아무리 물어봐도 다 아니라고 할 뿐, 울음이 그치질 않습니다.

1, 2교시 연달아 수업이었던 관계로 잠시 달래 놓고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이미 조퇴를 한 뒤였습니다. 좀 더 대화를 했어야 하는 건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이 뭐였을까? 생각하며 무거운 무기력감을 느꼈습니다.

“마음이 이상해요.”라는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뭔가 설명할 수 없었던 이상한 마음이 무엇이었을까요.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을 만납니다.
가끔 너무 예쁘고 감동스러울 때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하여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가끔은 거대한 말썽을 피워, ‘아, 수도자가 되길 참 잘했구나. 난 사춘기 딸을 둔 엄마는 정말 못했겠다.’ 라는 안도의(?) 한숨을 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마음이 아프고 무기력함을 느낄 때는 마음 문을 꽁꽁 닫아버린 학생들을 만날 때입니다.

돌아보면 제 고등학교 시절도 그렇게 찬란하거나 신나진 않았습니다. 뭐 하나 기쁜 일 없이 등수와 점수 사이에서 일희일비하면서 그렇게 지냈죠. 선생님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뛰어난 학생도 아니었고, 요즘 아이들 표현처럼 교실에선 그럭저럭 있으나 없으나 티 나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런 학생들을 만나면 한 번 더 보게 되고 말도 걸게 됩니다.

몇 년 사이 만난 학생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감정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죠. 뭐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감정을 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저도 제 자신의 감정을 남을 통해 듣기도 하니까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상당수 이혼 등에 의한 가정의 파괴나 부모님의 방임, 과다한 집착 등에서 오는 큰 상처들이었습니다. 이 상처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아이들의 감정을 딱딱하게 만들었습니다. 감정을 딱딱하게 만들었다기보단, 실제 있는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게 심장이 딱딱해졌다고 해야 맞는 걸까요?

어쩌면 아침부터 달려와 펑펑 울던 아이가 남기고 간 그 한마디, “수녀님, 마음이 이상해요.” 이 말이 지금까지도 제 귓가를 맴도는 건, 그렇게밖에 자신의 복잡하고 힘든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아이들의 구조 요청처럼 들렸기 때문은 아닌가 합니다.

“그냥 생각하기 싫어요. 생각하기 시작하면 너무 힘들어져요. 감당할 수 없다고요.”
웃으면서 열심히 떡볶이를 먹던 아이는 젓가락을 휘저으며 무심히 말했습니다.

이상한 마음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대화를 나눠 보려 했던 질문들이 오히려 이제 겨우 열리기 시작한 아이의 마음 문을 잠가 버릴까 겁도 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진 않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단지 비슷한 모습의 고등학생 시절을 지낸, 그때 정말 힘들었었다는 것을 이제야 느끼기 시작한 어른에 불과하니까요.

▲ 내가 너의 대나무 숲이 되어 줄게. (이미지 출처 = Pixabay)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더 복잡해질 것 같아 거부해 버리는 학생들을 계속 만나며,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감정 또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공감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많은 사건들의 근본적 문제는 타인이 느낄 고통과 상처에 대한 공감 불가에서 시작한다고 봅니다. 자신의 선택, 행동이 타인과 그의 가족으로 하여금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한 번만이라도 생각하고 느껴 본다면 이렇게 많은 사건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요?

물론 이 모든 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만 본다면 이런 일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자체가 감정 불감증의 시대 한복판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 모든 것이 고스란히 청소년들에게 세습되어 가는 모습을 현장 여기저기에서 만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가끔은 속 시원히 말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어디에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음엔 돈가스를 먹겠다며, 호기롭게 외치고 버스 정류장을 향하던 아이가 툭 던진 말이 또 귓가를 맴돕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안전하게 이야기할 곳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 자신의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 나가다 보면, 자신의 감정도 다른 사람의 마음도 알아 볼 수 있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변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특별히 자라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들어 주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인 것 같습니다.
그 어떤 성급한 판단 없이, 그 어떤 내 경험 위주의 해결책 없이, 끝없는 잔소리 없이 그냥 그저 자리를 지키고 들어 주는 것.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 때문에 마음이 이상해지는지 이제는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들어 줄 때인 것 같습니다.

B야~
지난번에 속 시원히 말해 보고 싶은데 어디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너에게도 답답할 때 소리 지르러 갈 수 있는 대나무 숲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단다.
수녀님이 너의 대나무 숲이 되어 줄게~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에 나오는 대나무 숲은 바람에 흔들리며 임금님의 비밀을 온 동네에 전해주었지만, 나는 바람이 안 부는 곳에 있는 대나무 숲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대나무 숲을 만나겠지만, 학교에 있는 동안, 또 네가 찾아오는 동안은 대나무 숲이 되어 줄 테니 언제나 와서 소리 지르렴.


P.S 주변을 돌아보세요.
누군가 내 주변에 대나무 숲을 찾지 못해 심장이 딱딱해져 가는 사람이 없는지요.

 
 

이지현 수녀(로사)
성심여고에 재직중이다.
청소년에게 삶을 노래하며 행복하게 살도록 돕는 꿈을 꾸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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