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이야기]


왜 다시 욥을 찾는가

전능한 신이 만든 이 세상에 항상 악이 존재하고, 고통을 겪는 이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문명이 발전하는 것과 정반대로 그 문명의 그늘에서 짓밟히는 인간들은 정글에서 받았던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에 비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으며 쓰러지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간들이 겪는 고통의 많은 경우는 같은 모습을 한 인간들에 의해 사회구조적 악이라는 가면을 쓰고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저질러지는 악의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며 가속화되는 악과 고통을 이겨낼 지혜를 찾기 위해 고통 받는 '의로운 사람 욥' 을 다시 찾는다. 지혜문학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성서의 욥기에서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과 그가 겪는 고통을 통해 알게 되는 인간 존재의 상황, 악과 고통을 넘어 의로움과 희망으로 가는 힘과 지혜를 얻어보려는 것이다.
성서에서 욥은 의로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고통 받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세 친구들은 재난의 원인이 욥에게 있다며 오히려 그를 비난한다. 욥은 고통의 이유에 관해 친구들과 논쟁하고 하느님에게 탄식하며 자신이 겪는 고통의 현상과 본질에 관해 알아가게 되고, 결국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된다. 욥의 친구들이 인간이 겪는 고통에 대해 다양한 이유를 들이대는 것처럼 욥기에 관한 해석의 역사 또한 길고 다양하다. 그 중에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통에 깊은 연민과 연대를 바탕으로 하여 악의 본질을 꿰뚫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주석은 욥으로 대표되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이 겪는 고통과 그 해결을 향한 예언적 전망을 제시하는 깨어있는 목소리이다.

오늘 우리는 또다시 욥기를 읽는다. 고통과 함께 무너지지 않고 기어이 하느님을 보게 된 욥의 역설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오는가?


욥은 왜 고통을 당하는가? 고통 당하는 이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이 맞닥뜨리는 악의 뿌리가 인간을 넘어서는가? 이에 관해 욥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시작을 한다: 야훼께서 사탄에게, "그래,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하고 말씀하시자, 사탄이 야훼께 아뢰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당신께서 친히 그와 그의 집과 그의 소유를 울타리로 감싸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셨고 그의 가축을 땅 위에 번성하게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보십시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 야훼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의 소유를 모두 네 손에 부친다. 그러나 그의 몸에만은 손을 대지 마라." (욥 1,8-9. 12)

악한 세력의 음모로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욥은 비로소 가난한 이들의 실상에 눈이 뜨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길에서 밀쳐내니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들은 아예 숨어야 하는가. 들나귀처럼 일거리를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보게. 행여나 자식들에게 줄 양식이라도 있을까 하여 광야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저 모양을 보게. 악당들의 밭에서 무엇을 좀 거두어보고 악인의 포도밭에서 남은 것을 줍는 가련한 신세, 걸칠 옷도 없이 알몸으로 밤을 새우고 덮을 것도 없이 오들오들 떨어야 하는 몸, 산에서 쏟아지는 폭우에 흠뻑 젖었어도 숨을 곳도 없어 바위에나 매달리는 불쌍한 저 모습을 보게.

아비 없는 자식을 젖가슴에서 떼어내고 빈민의 젖먹이를 저당잡아도 괜찮은가, 걸칠 옷도 없이 알몸으로 나들이를 해야 하고 빈 창자를 움켜잡고 남의 곡식단을 날라야 하는 신세, 악인들의 돌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포도 짜는 술틀을 밟으면서 목은 타오르고 죽어가는 자의 신음 소리와 얻어맞아 숨이 넘어갈 듯 외치는 소리가 도시마다 사무치는데 하느님은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아니하시네. 악인은 떳떳한 생활을 꺼려하여 밝은 길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 길을 따라 살려고도 않는 자들, 해만 지면 살인자가 활개를 치며 빈민과 가난한 자들을 죽이려 찾아 다니고 밤만 되면 도둑이 판을 치는 세상." (욥 24, 4-14)

자신의 고통에 울부짖는 욥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의 이유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욥은 하느님을 향해 탄식한다.

"사람을 감시하시는 이여,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당신께 무슨 큰 손해라도 된단 말씀입니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내가 당신께 짐이 된단 말씀입니까 (욥 7,20) 나를 죄인으로 다루지 마소서.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내리십니까? 그 까닭이라도 알려주소서. 당신께서 손수 만드신 것을 억압하고 멸시하시는 것이 기쁘십니까? 악인의 꾀가 마음에 드십니까? "(욥 10,2-3)

"어찌하여 나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이 몸을 원수로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당신은 이 낙엽 같은 것을 놀라게 하시고 이 마른 검불 같은 것을 닦달하십니까?"(욥 13,24-25)

"산이 무너져 내리고 큰 바위가 제자리에서 밀려나듯이, 반석이 물결에 닳고 땅의 티끌이 폭우에 씻기듯이, 그렇게 당신은 사람의 희망을 끊으십니다." (욥 14, 18-19)


고통에 맞서는 욥의 희망

그러나 고통이 심해질수록 욥의 희망 또한 끈질기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 (욥 19,25-27)

악인의 현재와 미래는?

대체 욥이 당하는 고통을 부르는 악인들은 어떤 모습이고 어떤 미래가 이들에게 돌아올 것인가.

"빈민들을 억눌러 들볶고 남이 지은 것을 빼앗기나 하면서 자기는 어찌 무사하리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긁어 모은 재산에 얽매여 꼼짝없이 망한다네. 남아날 것 없이 마구 집어삼키고 어찌 자기의 영화가 오래 가리라고 믿겠는가? 남아 돌아 흥청대다가, 재난이 밀어닥치면 갑자기 옹색하게 되고 만다네."(욥 20,19-22)

"하늘은 그의 죄악을 폭로하러 나서고 땅은 그의 죄상을 증언하러 나서리니 하느님의 진노가 터지는 날, 그의 집은 홍수에 쓸려가고 말 것일세. 죄인이 하느님에게서 받을 분깃은 바로 이것, 이것이 하느님에게 물려받을 유산 아닌가?" (욥 20, 27-29)

고통을 통해 알려지는 하느님의 신비와 지혜

악한 세력에 밀려 고통에 허덕이는 인간의 신음을 들으며, 그 고통을 통해서 의로운 인간을 성장시키는 하느님, 그분은 어떤 분일까

"하느님께서는 지혜를 살피시고 헤아리셨네. 슬기를 세우시고 시험하셨네. 그리고 사람에게 이르셨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곧 지혜요, 악을 싫어하는 것이 곧 슬기다." (욥 28,27-28)

"하느님께서 듣지 못하신다는 것은 허튼 소리, 전능하신 분께서 보지 못하신다는 것은 거짓말이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지 않으신다고 해서 엄청난 주장을 펴지만 이미 당신 사건은 그의 앞에 놓여 있다오. 그러니 기다리시오." (욥 35, 13-14)

"못하실 일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흠 없는 사람을 물리치지 아니하시며 불의한 사람을 살려두지 아니하시고 억눌린 사람의 권리를 반드시 세워주신다오. 바르게 사는 사람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언제나 왕들과 같은 자리에 앉혀 영광을 누리게 하신다오." (욥 36,5-7)

"하느님께서는 고생을 시켜가며 사람을 건지신다오. 고난 속에서 사람의 귀가 열리게 해주시오." (욥 36,15)

"우리 인간이 어찌 이 전능하신 분께 이르겠소? 못할 일 없으시며 공평무사하신 그분이 어찌하여 억울한 일을 하시겠소? 인간이 어찌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소?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는 자를 안중에도 두지 않으시는 그분을."(욥 37,23-24)


고통을 넘어서는 희망의 근거

욥은 어떤 선택을 통하여 그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악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나.

"나의 발은 그의 발길을 따라 그가 가시는 길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계명은 저버린 일이 없으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음 깊숙이 간직해 두었네."(욥 23, 11-12)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린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1-5)

말씀과 희망을 나눔

오늘 욥을 다시 만나는 것은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밝혀내고, 고통 받는 또 다른 나와 함께 고통 받는 이들의 연대를 구축하여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극복할 힘을 키우고 나누기 위함이다. 우리는 욥이고 또한 욥을 찾아온 친구들이다. 욥이 겪는 고통의 사건을 통해서 악의 연대와 무고한 이들의 울부짖음에, 또 그에 대한 공동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러나 동시에 고통의 원인이 욥에게 있지 않았듯이 고통 받는 욥을 버리지 않고 그의 고통에 연대하는 하느님, 그 모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욥을 믿는 하느님에게서 인간이 갖는 모진 희망의 뿌리가 하느님에게 있다는 역설을 발견한다. 고통을 넘어서 희망하는 인간의 끈질긴 힘과 이러한 인간의 미래가 실현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욥이 희망을 놓지 않듯이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에서 말씀을 나누고, 말씀의 진리가 실현되는 것을 소망하고 믿는다. 말씀이 인간이 되셨듯이 우리 가운데서 생명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 성령의 바람이 불듯이 온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