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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도법 스님의 생명평화순례 강연회

   

지난 2월 21일 둥근 달이 휘영청 뜬 대보름 날 다음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건설예정지를 따라 걷고 계신 도법 스님을 모시고 생명, 평화 그리고 순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었다. 이번 강연회는 가톨릭환경연대, 생명평화기독연대 그리고 인천시민사회단체들의 모임인 인천시민사회포럼 이렇게 세 개의 단체가 마음을 모아 함께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 강연회가 있은 인천교구 답동 가톨릭회관 512호에는 시작 전부터 다양하고,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사제, 수도자, 목사, 스님, 평신도들 그리고 다양한 시민단체 회원, 활동가들이 강의실을 가득 메워 준비하는 사람들은 계속 의자를 날라 와야만 하는 풍경이 벌어졌다.

강의 시작 전 앞풀이는 생명평화기독연대 소속 백영민 목사님과 함께 '힘내라 맑은 물'이라는 노래를 함께 배우며 불러보는 시간을 가졌고, 이어 가톨릭 전산/홍보실장이며 환경사목위원인 임현택 신부의 환영사가 이어졌다. 자리에 나온 도법스님은 평소 한반도 여기저기를 많이 걷다보니, 걷는 것 하나는 잘하다 보니 이런 자리에까지 서게 된 것 같다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 다음은 김정화 헤르만 수녀(고강동성당)가 도법스님의 강연 내용을 녹취한 것입니다. 수녀님께 감사 드리며, 귀한 이야기를 지면에서 다시 읽어 봅니다. --편집자

20세기의 가치들은 변화, 개발, 성장, 발전의 가치였고, 21세기는 아무리 좋은 변화와 발전이라도 지속이 담보되지 않는 발전은 재앙이라는것이다. 50년 전 보다 우리는 100배 더 발전되었고 잘살게 되었고 편리하게 살게 되었다. 10배 더 부자가 되고 100배 더 편리해졌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좋은 세상이 이루어졌는가?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행복한가 하고 내용을 짚어보면 불행하게도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아니면 또 다른 형태로 훨씬 더 복잡하고 위험하고 불확실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강대국일수록 이 물음 앞에 설 수밖에 없다. 세상은 더 험악해지고 각박해지고 있다. 또 거기에 머물지 않고 자연생태의 오염과 파괴로 인해서 자연 생태적 재앙이 덮쳐오고 있다. 홍수, 폭설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인격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각한 병들을 앓고 있다.

   


변한 만큼 발전한 것은 아니다

변화하고 발전한 만큼 문제가 해결되고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삶의 문제는 복잡해지고 있다. 많은 양심과 지성들은 21세기를 생명위기시대, 평화위기시대라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물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변화하고 발전만 하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로 가기만 하면 도시사회로 가기만 하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다.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왜 문제는 해결되기는 커녕 더 어려워지고 위험해지는 이유는 뭘까? 그동안 우리가 주장해왔던 논리대로라면 변화하고 발전하면 행복해 질꺼야. 이 논리가 맞았다면 백배 더 부자가 되고 백배 더 편리해진 만큼 좋은 세상이 되야 하니까, 우리삶이 더 평화롭고, 아름답고, 품위있고 행복해져야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운동을 편 사람들에 의해 정리된 개념이 생명 평화라는 개념이다.

그동안 우리는 민족의 이름으로, 국가와 경제의 이름으로 삶의 문제를 다루어왔지, 지금여기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생명의 문제로 삶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지금여기 내 생명이 살아있지 않다면 민족 종교 이념 정치 사회 교육 문화는 무슨 의미가 있을지? 지금여기 내 생명이 살아있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하는 이 삶은 펼쳐지기나 할 수 있는 걸까? 국가와 민족종교의 가치보다도 더 우선하는 생명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생명의 논리로 삶의 문제를 다루었어야 했는데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 본질을 그 핵심을 놓쳤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이념의 이름으로 경제의 이름으로 이해타산의 이름으로 삶의 문제를 바라보고 다루었다.

우리가 변화하고 발전하려는 이유도 그 목적이 지금 여기 내 생명이 안전하게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지금여기 내 생명이 안전할 수 없고 지금 여기 내 삶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일까? 종교가 이념이 필요한 것일까? 정치경제 사회, 문화는 온갖 그럴듯한 명분과 논리를 갖고 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짚어보면 우리는 이 한 목숨 유지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데, 열심히 두 세시간을 들여 축구 잘하는 아이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 들이는 데 애를 썼지만, 정작 시합을 하려고 보니 축구공이 없었다는 우화가 있다. 우리인생도 그렇게 살았다. 우리들이 부자 되자 일등이 되자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지금여기 내 생명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는 길이 그 길이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는 거다. 실제 부자가 된다고 일등이 된다고 지금 여기 내 삶이 평화로울까?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평화와 행복의 조건이 부자다. 일등이다 이렇게 믿어버린다. 그래서 너도나도 일등과 부자가 되기 위해 목을 맨다. 지금 한국사회가 그렇다 극단적인경쟁논리를 가지고 결국 일등타령과 부자타령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다 필요 없고 일등이냐 부자냐가 우선이다.

내 생명이 살고 픈 삶은 평화롭고 행복한 삶인데 그 삶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모르다 보니 그렇게 살면 행복할지 평화로울지 제대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마치 남이 잘 가니까 뒷짐지고 따라가는 부자일등은 행복한거야 하고 휘말려서 따라 간다. 이렇게 생명위기 평화 위기로 표현되어지는 현대 문명의 실상에 대해서 뼈아프게 성찰하고 진단하고 모색하다 보니까 마치 축구 우화처럼 본질 근본 핵심을 망각하고 엉뚱한 것을 붙잡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명사적 대안을 찾자라는 생각을 한다

21세기 문명사적 대안 운동은 평소에 생명과 평화 원리로 삶을 바라보고 지금여기에서 생명평화의 삶이 내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위기에 대한 대안은 미국에서 분리될 수 없는 한반도의 운명이지만 내가 진리와 사랑의 힘을 비 폭력의 행동을 통해서 한반도 문제를 대처하고자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인 탁발순례다. 걸어서 순례하고 지역주민과 만나서 일상적으로 생명평화의 문화를 가꾸는 일을 한다. 우리는 자유를 얘기하고 평화를 얘기하고 정의를 얘기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절간에서 교회에서 정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까 그렇게 많은 수행자들이 아침저녁으로 곳곳에서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루어 지지 않고 있을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정의 평화를 얘기하지만 우리는 한번도 패거리논리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국가, 민족, 종교, 이념, 자유, 평화의 이름으로 상대의 생명을 죽이고 상대의 평화를 파괴하면서 살아 왔던 게 그동안 문명사회의 모습이다. 불교인들이 모여서 평화를 얘기할 때는 기독교인들이 포함되지 않고, 미국사람들이 얘기하는 평화에는 이라크사람들이 포함되지 않는다. 여기에 이라크 사람들이 포함된다면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 우익인사들이 생각하는 평화에는 좌익 인사들이 포함되지 않는다. 종교라는 패거리, 국가라는 패거리, 이념이라는 패거리논리에 근거해서만 자유평화를 얘기했다.

그래서 우리 21세기가 붙잡고 가야할 화두는 생명 평화라는 화두다, 그렇게 정의하고 하루 4,5십리씩 걷는다. 한 군에 일주일씩 걷는다. 걷는 순례를 선택한 이유는 자기 성찰을 위해서다. 왜 자기 성찰의 삶이 중요할까?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자기 내면에서 울려오는 양심의 소리, 하느님의 소리, 부처님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성찰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참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성찰을 통하지 않고서는 참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참된 모습을 들을 수 없고 참된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온통 거짓된 소리와 거짓된 모습만 본다. 사람은 듣는대로 보는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 한다. 어쩔 수 없다.

일등일등일등...일류일류일류

우리는 신문 방송의 소리 많이 듣는다. 신문 방송에서 제일 많이 듣는 소리는 부자와 일등이다 강자, 승리. 최고... 학교에서는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 그것뿐이다 일등일등일등...일류일류일류... 저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 모여 하는 얘기도, 대통령 청와대에서 학교에서 하는 얘기도 온통 그 소리다. 일등타령 부자 타령이다 그러다보니 내 사고도 내 언어도 내 행동도 거기에 맞춰져 사고하고 행동하고 온통 일등과 부자의 노예가 되어있다.

정말 과연 일등이라는 게, 부자라는 게 그렇게 좋은 것일까 일등 되고 부자 되면 행복해 지는 것일까 하고 내용을 짚어보면 미안하지만 전혀 아니다. 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착각일 뿐이다. 부자가 행복하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실제 부자와 일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촌의 가장 부자인 나라하면 미국을 든다. 그럼 60억 인구가 미국처럼 먹고 쓰고 살면 어떻게 될까? 미국사람들처럼 부자가 된다면 저 도로의 자동차 소리가 멈춘다. 그것은 바로 현대 문명이 마비된다는 뜻이다. 한국 사람들처럼 먹고 쓰면 어떻게 될까? 그도 마찬가지이다. 부분적으로 보면 부자가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재앙이다.

부자가 뭡니까? 아 난 충분해, 이제 난 더 이상은 필요 없어, 이만하면 됐어, 하는 만족하는 것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조건에 대해 만족하는 거다. 이래야 부자인거다. 미국이 그럽니까? 그렇다면 이라크 전쟁 안 해도 됐겠죠.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니 미국은 부자가 아닌 거죠. 부자란 얼마나 많이 갖는 가가 아니라 스스로 가지고 있는 조건에 만족 하는 거다. 미국은 대외지원 예산이 가장 많은 나라다. 좋은 일 많이 한다. 대외지원 예산이 많다는 것은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 과연 정당한 과정이었을까? 그로 인한 부작용은 없는 것일까? 그로 인해 억울한 사람은 없는 것일까? 대외지원을 많이 할 수 있는 거대한 자원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분명 억울한 사람도 무수하게 발생했을 것이다. 더 가난하고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대외적인 예산을 많이 쓸 수 있는 오늘의 미국의 부가 만들어 질 수 없다.

새해 부자 되세요

이렇게 부자 논리를 사실적으로 짚어보면 그 부자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너무나 반 혁명적이고 비 인간적이다. 누군가를 불행하게 누군가를 억울하게 누군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수반되고 있다면 그 과정 자체가 좋다고 할 수 없다. 부자를 이루고 보니까 이루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만족할 수 없을 뿐 아니라 60억이 똑같이 부자 되어 살면 큰 일 나는 것이다. 아무리 따져 봐도 부자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되봐야 좋은 것도 아니고 또 이루어지는 과정들을 보면 너무나도 비 인간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부자라는 환상에 현혹되서 거의 제 정신이 아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덕담이 새해 부자 되세요 라는 말로 바뀌었다. 얼마나 이 사회가 천박 되어지고 품위를 잃어가고 있는가를 너무나 극명히 드러내는 처사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참된 소리( 국가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돈의 이름으로 일등의 이름으로 오염되기 이전의), 순수한 내 영혼의 소리, 내면의 소리, 내 생명의 소리, 내 가슴의 소리, 내 양심의 소리,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고 살기 때문에 온갖 조작된 허위 허식으로 이루어진 조작된 소리에 매몰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순례자는 스스로가 성찰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자기소리를 들어보자. 참된 소리 좀 들어보자 하는 의미에서 우리는 걷는 것을 택했다. 참된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는 그 소리에 따라 살아 갈 수 있다.

또 하나는 사회적으로 그런 메시지를 우리는 전달하고 싶다. 우리가 지역을 찾아가는 것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관계들은 온통 거래 관계이다. 진정성을 갖고 성의 있게 사람을 만나는 것이 필요하겠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일까? 생각했을 때 우리가 선택한 것은 걸어서 가는 것이었다. 제가 여기 오게 된 것도 걸어 다녔기 때문에 여기 오게 되었다.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탔으면 여기 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얻어먹고 얻어 잔다. 이 일은 지금은 천시하는 일이다. 탁발하는 이유는 얻어 먹으려면 겸손해야 한다. 현대로 올수록 그악스럽게 우리는 내 것만 챙긴다. 누군가에게 밥을 준다는 것은, 조건 없이 준다는 것은, 나 아닌 누군가를 우해 우리시대의 공동선을 위해 내가 먹고 있는 밥 한 그릇 돈 천원 잠자리를 내준다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일이며 자기를 비우는 일은 자기를 정화시키고 승화시키고 풍요롭게 품위 있게 하는 일이다. 이런 풍토를 가꾸는 일을 하고자 한다. 인간이 너무 자만에 빠져있다. 내 인생을 내가 내 능력으로 산다고 알고 있는 것 큰 문제이다. 이건 무지와 오만이다. 인간이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그리 많지 않다.

하늘의 태양이 빛나지 않는다면 여기 삶이 가능할 것 같은가? 돈만 있으면 일등만 하면 내 삶은 안전한 것인가? 태양이 없으면 꽃이 필수 없다. 꽃이 피어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열매가 맺어지지 않으면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질 수 없다 김치 한 그릇, 된장국 한 그릇 만들어질 수 없다. 태양이 없으면 여기 내 삶이 절대 존재할 수 없다.

   

밥을 먹어야 예수노릇 부처노릇 대통령 노릇한다

하느님이 필요하죠? 부처님이 필요하죠? 아무리 부처님 이라하더라도 예수님 이라하더라도 밥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밥을 먹어야 예수노릇 부처노릇 대통령 노릇한다. 밥을 먹어야 여기 내 생명이 살아있을 수 있고 내 생명이 살아 있어야 참선도 하고 기도도 하고 자유도 얘기하고 꿈도 얘기하고 사랑도 얘기할 수 있다. 밥을 먹지 않고는 할 수 없다. 밥은 누가 만들어냅니까? 태양 없이 밥을 만들어집니까? 봄 여름가을이 없이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집니까? 인간의 힘으로만? 절대!

자연 생태적 조건, 자연법칙과 자연 질서가 정상적으로 전개되어지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자연법칙과 자연 질서가 정상적으로 전개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인간이 무슨 노력을 해도 밥 한 그릇 만들어 낼 수 없다. 온통 우리는 얻어먹고 살고 있는데, 태양의 신세를 지고 바람의 신세를 지고 땅의 신세를 지고, 물의 신세를 지고 더 자세히 가면 미꾸라지, 지렁이, 미생물 그들의 활동에 의해서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가 밥을 먹는다. 우리는 허약한 존재이다. 이 정도면 겸손해져야한다. 뭐 잘났는가? 제 인생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 게 없다. 만들어진 쌀을 물에 넣어서 불 지피는 것 정도 할 수있다. 아무리 밥 잘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밥통이 있다하더라도 쌀이 없으면 밥을 할 수 없다.

우리 인제는 제대로 알자. 우리 자신을 좀 알자. 제대로 보면 우리는 거지다. 태양, 산천초목의 신세를 지고 사는. 산천초목이 내 생명의 모체, 내 생명의 하느님이다. 핵무기를 만드는 대단한 인간이지만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이다. 이것이 탁발을 하게된 이유이다. 똑똑하고 잘난 능력을 가진 인간이더라도 부처님 예수님 관계 없고 보수 진보관계 없고, 도시 농촌도 관계 없고, 대동소이한 하나가 있다. 지금 여기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 내 생명이 어떻게 이루어진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평화롭고 행복 할 것인지 이것에 대해서는 다 바보 천치다. 나 아닌 다른 것에 대해서, 내 생명 아닌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하느님 이상의 박학다식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런데 정작 내 삶의 주체인 내 자신에 대해서 내 삶에 있어서 하나 밖에 없는 내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 이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다른 건 몰라도 하나밖에 없는 내 생명에 대해서는 알아야죠 그렇지 않나요?

운하 순례 3가지 이유

1.왜 운하문제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내는 확실한 길로 떠올랐을까?
이명박 이명박 하는데 이것이 이명박의 문제일까? 대운하를 내걸고 대통령이 되었다. 혼자된 것 아니다. 우리가 시켜줬다. 운하문제를 숨겼다가 대통령된 뒤에 말한 것이 아니다. 한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나 운하 할꺼야! 운하하면 경제가 살아나! 그래서 우리는 표를 줬고 대통령이 됐다. 그건 뭘 얘기하는가? 운하문제는 바로 내가 갖고 있는 가치의식과 삶의 방식과 직결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자를, 돈을 그렇게 좋아하니까 부자만이 꿈이고 아무것도 소용 없어라는 가치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임을 나타내 준다. 결국 운하문제는 이명박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가치의식과 삶의 방식의 문제이다고 본다.

물론 운하를 막아야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운하를 막는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운하를 하지 않아도 우리가 계속 돈과 부자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한 우리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생태 환경은 계속 오염되고 파괴 된다. 너도나도 더 많이 더 부자 더 편리하기를 추구하는데 어떻게 한반도 자연 생태적 조건들은 오염시키고 파괴하지 않고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가치의식과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근본적인 자기 전환을 모색하는 것들이 전개되지 않고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한반도의 생태계는 부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제 자신을 면밀하게 되짚어 보고자, 저도 돈을 좋아하고 기왕이면 맛있는거 먹고 싶고 더 좋은 집에 편하게 자고 싶고 그렇습니다. 이 잘못된 버르장머리, 이 잘못된 소견머리를 어떻게 뿌리 뽑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들이 저로 하여금 운하순례를 하게 한 것입니다.

2.운하건설은 너무나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일이다.
요즘 우리는 세계화, 지구촌, 선진화, 21세기, 이런 개념들로 우리 시대문제를 인식한다.
이명박을 대통령시킨 사람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선진화일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세계선진국들이 모여서 협의한 내용은 지속가능한 사회이다. 적어도 선진사회로 갈려면 한국의 모든 정책 구조가 지속가능 발전 사회로 가는 정책이어야 한다고 본다. 선진사회에 맞는 철학을 갖고 가야한다. 말은 선진 사회를 주장하면서 내용은 선진사회의 가장 기본적 조건을 무시하고 파괴하고 오히려 역행하며 간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청계천하고는 바탕이 다르다. 내용이 불충분 하더라도 청계천은 죽은 것을 살려낸다는 바탕이었지만 운하는 다르다. 엄연히 살아있는 걸 죽게 될 수밖에 없도록, 백두대간을 뜯어 고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정신은 지속가능사회이다. 그 절대 조건은 자연 생태적 조건이다. 한반도라는 자연 생태적 조건을 건전하게 가꾸는 걸 전제로 했을 때만 지속가능발전이 가능하다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시대정신에 후퇴해도 너무 후퇴하고 있다.

3. 불교적 관점이다.
불교에서는 세 가지 범주를 얘기한다. 지구라는 자연, 인간들 ,부처님, 이 세가지는 그 가치가 똑같다. 인간의 활동 무대 부처의 활동 무대인 지구라는 자연 생태적 조건이 건강하게 살아있지 않고는 부처도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 자연생태의 파괴는 하나밖에 없는 내 생명의 조건을 산산히 조각내는 일이다.

이런 운하문제가 불거지게 된 원인을 짚어보면 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내가 갖고있는 돈, 좋아하는 더 좋은 자동차, 더 큰집, 더 고급스런 옷, 더 편리한 것을 좋아하는 속물적 근성이 나에게 있고 이것들이 운하문제를 가져오게 한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뼈아픈 자기성찰 자기 각성을 이끌어 내야겠다. 운하문제는 하나의 기회로 본다. 운하문제를 막아내지 못하고 대운하 사업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이제 정말로 생태적 가치의식을 갖고, 생태적 삶을 살고 싶고, 시대정신에 맞게 지속이 가능한 사회로 가도록 내 삶의 방식을 바꾸겠어! 이렇게만 된다면 나는 운하 사업이 이루어져도 좋다고 본다.


내 실상의 생명을 다시 타진해 보면 지금여기 나는 온 우주가 다 참여하고 관계 맺어서 지금 여기에 있다. 기득권을 주장할 아무것도 없다. 당연히 겸손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를 비워야 한다. 자기 것 아닌데 자기 것이라 할 것 없다. 자기 것 아니니 나눠야 한다. 내 생명의 실상을 잘 파악하고 이해해서 내 생명의 정체성에 맞게 사고하고 살아가야 한다. 내 생명의 정체성에 맞는 것을 범주화시키면 자기를 낮춘다. 비운다. 나눈다.

그러면, 내 생명을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대상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부모는 나에게 절대적으로 귀하고 고마운 존재이다. 왜? 낳아주고 길러주었기 때문. 그러면 태양이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건 어떻게 할건가? 부모가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어서 고맙듯 이 세상 나 아닌 너라고 하는 대상은 모두가 내 생명의 모체요 내생명의 근원이요 내 생명의 어버이다. 세상에 생명을 낳아주고 길러준 것보다 더 거룩한 것이 있나? 없다. 태양이 나를 길러내고 땅이, 이웃이, 나를 길러낸다. 그 대상은 나에게 너무나 고맙고 귀한 존재이다. 그 고마운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가? 당연히 우리는 그 고마움을 인정하고 존중해야한다. 생명 평화운동은 내 생명, 평화 운동입니다. 내 생명, 평화를 위해 운하반대 순례를 하는 것이다.

/이대원 200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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