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10]

- 오캄의 정치학 읽기 1

영웅을 기다린다. 그 영웅이 우리의 삶을 바꿔 주길 기다린다. 무력하게 서 있는 나의 삶을 바꾸어주길 기다린다. 사실 아주 오랜 시간 우린 그렇게 영웅을 기다렸다. 너무나 도덕적이고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청렴한 어떤 영웅이 등장해 그가 우리를 다스려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그런 영웅이 없음을 가르쳐준다. 설사 그러한 영웅이 있다 해도 그 영웅의 뒤에 이어질 이가 그와 같은 영웅이라는 법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영웅을 기다리는 그 수동적 자세로 우리의 삶이 달라지긴 힘들다. 사실 그렇다. 우리 행복이 나의 외부에 있는 그 영웅에게 의존하는 이상, 나의 행복은 항상 불안하다.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세월호 사건 이후 국가와 정부가 나의 행복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가장 기본적 구조는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졌다. 국가와 정부는 나의 외부에 있는 존재이며, 그 국가와 정부는 나의 삶에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런 국가와 정부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도 없다. 이제 나는 영웅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 영웅이 되어야 했다. 이제 국가와 정부도 그저 남으로 둘 수 없다. 날 위해서라도 내가 국가가 되고 정부가 되어야 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촛불이 있었다. 기대의 빛이 하늘에서 내리길 기다리지 않았다. 스스로 이 시대의 빛이 되려 했다. 민중은 생각 없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그 삶의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생존하려는 이들이다. 그들의 자리에서 그들의 삶의 논리 속에서 자발적으로 든 그 촛불을 무시한다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반민주주의적 작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 대헌장(Magna Carta)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13세기다. 영국의 왕은 전쟁과 자신의 지위를 위하여 세금을 올렸다. 민중들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결국 영국이란 국가의 고통은 민중들이 나누어지고, 그 승리는 왕이 독점하는 듯한 그 모습에 민중들은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왕은 민중을 위한 존재가 아니었다. 왕은 국가의 소유주이며, 그 국가에 소속된 민중들의 소유주인 듯이 행세했다. 그 왕은 법의 외부에서 자신 홀로 자유를 누렸다. 수많은 민중의 고통을 거름 삼아 말이다. 결국 민중은 "대헌장", 즉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라는 분노를 통하여 왕 역시 법을 지키는 존재, 법 가운데 구속되는 존재가 되라 했다. 민중의 첫 강력한 분노 앞에서 결국 왕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왕은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주교 서임권을 두고 다투던 교황에게 손을 벌린다. 이 오랜 앙숙이 민중의 분노 앞에선 손을 잡았다. 교회는 "대헌장"에 참여한 영국의 성직자를 징계했다. 그리고 "대헌장"의 내용을 부정했다. 영국의 왕도 태도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 민중의 오랜 분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기 오캄이 태어난다. 오캄은 보았다. 결국 국가권력도 교회권력도 민중의 분노, 민중의 권력을 싫어한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정말 현실 공간 속에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민중들이었다. 민중의 고달픔의 값으로 좋은 성당이 가능했다. 민중의 고통의 값으로 국가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교회도 국가도 민중의 고통을 온전히 알아주지 못했다.

오캄 이전 대부분의 형이상학자는 보편실재론자였다. ‘영국인’이란 보편 술어로 서술되는 모든 이들은 ‘영국인’이란 보편 술어의 정의를 따라야 했다. 손에 감각되지 않는 그 추상적인 무엇이 현실의 개인들을 구속했다. ‘영국인’이란 보편 속에서 그것을 참된 실재라며 살았다. 오히려 그 변화하지 않는 보편이 구체적 삶 속에 살아 있는 개인보다 더 진짜라며 살기도 했다. 눈에 보이고 감각하는 이 고통스러운 영국인으로의 삶보다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어쩌면 죽어서 도달할 수 있는 그 비감각의 세계는 더 진실한 것이라 믿고 살았다. 그러나 오캄은 유명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보편이란 그저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정말 존재하는 것은 바로 여기 한 사람이다. 한 개인이다. ‘한국인’이나 ‘인간’이란 보편이 아닌 ‘유대칠’이란 한 개인이 참으로 존재한다. 그것만이 인간이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사실이다. 바로 개인, 개체가 존재한다.

영국이란 국가는 영국인이란 보편으로 이뤄져있지 않다. 영국이란 국가는 수많은 개인의 다발이다. 개인의 모임일 뿐이다. 개인들이 모여 서로 의견을 나누며 이루어가야 할 덩어리다. 그것이 국가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 개개인의 삶을 위해 있다. 오캄은 개인을 강조한다.

한국인이니까 참자! 흔히 듣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인이란 그 보편 술어로 서술되는 얼마나 많은 개인이 있는가? 보편은 삶이 없다. 한국인이란 보편은 현실 공간을 살아가지 않는다. 현실 공간엔 낮은 자를 무시하며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물건을 던져 버리는 건방짐 가운데 갑질의 인간들과 컵라면 하나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일을 하다 죽임을 당한 청년이 있다. 한국인이란 보편은 현실을 살지 않는다. 현실은 이와 같이 구체적인 개인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개인의 삶은 불만으로 가득하다. 그때마다 그들은 말했다. 한국인으로 참아라! 한국 경제에 좋지 않다. 그러면서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이야기하며 한국인의 자긍심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한국인의 경제적 성장을 인정한다 해도 지금 바로 여기 온갖 부조리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개인의 아픔은 어찌할 것인가?

오캄의 철학을 유명론이라 한다. 유명론은 개인을 이야기한다. 진정 존재하는 것은 개인이다. 보편은 개인들에 대한 언어적 술어일 뿐이다. 영국인도 한국인도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저 술어다. 말이다. 그 말로 권력자들은 우리에게 참으라 했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이익을 챙겼다. 국왕은 자신만을 생각했다. 21세기 지금 우리를 보자. 한국인, 한국인의 성공은 몇 명의 가진 자들이 그 성공의 기쁨을 독점하고 한국인의 아픔과 실패는 한국인이란 이름으로 서술되는 모든 이들에게 공유시키는 이 시대의 모순 앞에서 오캄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면 오캄은 담담히 이야기할 듯하다. 바로 ‘너’가 국가다. ‘너’로 인하여 국가가 있고, 국가의 존재 이유가 바로 ‘너’다. ‘너’가 존재 근거이고 목적이다. 더는 영웅을 기다리지 마라. 지금 너가 영웅이어야 한다.

▲ "날 위해서라도 내가 국가가 되고 정부가 되어야 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서 촛불이 있었다. 기대의 빛이 하늘에서 내리길 기다리지 않았다. 스스로 이 시대의 빛이 되려 했다." ⓒ정현진 기자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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