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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아야 할 것’의 사이에서[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9]

- 인노첸시오 3세의 "인간 처지의 비참함" 읽기 4

“예수께서는 가시관을 머리에 쓰시고 자홍색 용포를 걸치시고 밖으로 나오셨다.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가리켜 보이며 ‘자, 이 사람이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19,5)

한 사람이 많은 이들 앞에 섰다. 빌라도는 외친다. “자!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세상 권세를 드러내는 왕관을 쓴 구세주가 아니었다. 가시관을 쓴 나약한 한 사람이 피 흘리며 서 있었다. 빌라도는 외친다. “자! 이 사람을 보라!” 과연 무엇이 보였을까? 하늘에서 천군만마가 내려와 그를 구하는 기적도 보이지 않았다. 조롱 앞에 그저 나약한 한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거대한 힘을 가진 구세주였을지 모른다. 지금의 힘든 삶을 끝내고 또 다른 세상으로 자신을 이끌어 줄 권능을 가진 어떤 존재였을지 모른다. 무력한 자신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 비교도 될 수 없는 기적의 존재! 그런 슈퍼맨을 보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눈 앞에 나타난 이는 초라했다. ‘보려 한 것’과 ‘보이는 것’은 너무 달랐다. 그 나약함으론 세상도 자신들의 힘든 삶도 심지어 당장 그 자신의 운명도 바꿀 수 없어 보였다.

‘보이는 것’은 참으로 초라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정말 보아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일 수 있다. 보이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남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것이 좋다. 남을 이기고 선 모습이 더 좋아 보인다. 남들과 나란히 가면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앞서야 한다. 이겨야 한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인간 처지의 비참함"에서 이런 모습을 인간 처지의 비참함이라 한다. 남을 이기고 서서 적당히 남을 무시하며 자신의 우등함을 느끼는 삶을 비참하다 한다. 오직 일등이 되어 남의 앞에 서려는 인간의 모습이 인간 처지의 비참함이라 표현한다.

   
▲ '이 사람을 보라', 안토니오 치세리.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야망을 가진 이는 자신의 명예에 빠져들어 있기에 교만(superbia)으로 가득하며 자기 자랑을 참지 못합니다. 자신이 어디 쓸 만한 존재인지에 대해서 애쓰지 않습니다. 그저 남들 앞에 선두로 나서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할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에게 좋게 해 주는 덕(virtus), 즉 품위(dignitas)와 정직(honestas)과 같은 것은 자신의 삶에 있어 우선 순위에 두지 않습니다. 교만한 이들은 이웃을 업신여깁니다. 과거에 만들어진 친분 따위는 무시해 버립니다. 오랜 친구를 멸시해 버립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서는 눈을 크게 뜨고 목을 뻣뻣하게 들고 다닙니다. 그저 건방져 보일 뿐인데 말입니다.” ("인간 처지의 비참함" 2권 30장, 유대칠 역)

남의 시선,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오직 그곳에 신경을 쓰는 이는 적어도 남에게 좋아 보이는 데 성공할 수 있다. 품위나 정직은 뒤로 물러나 있을지라도, 거대한 야망 속에서 일등이 되고자 하는 이의 모습은 초라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이들에겐 심지어 거짓도 성공을 위한 미덕이 된다. 자신이 가난하고 힘든 이들에게 쓸모가 있을지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구제 활동이란 것을 하지만, 속으론 가난한 이들을 아랫사람이라며 무시한다. 인노첸시오 3세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비참함’이라 한다. 이웃과 함께 살지 못하고 자신의 성공만을 바라보는 모습, 그렇게 보이는 모습을 말이다.

중세철학자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보이지 않지만 변하지 않는 진실된 모습인 ‘실체’(substantia)와 보이지만 순간마다 변하는 ‘우유’(accidens)다. 빌라도의 조롱 앞에 고난당하는 가시관을 쓴 이의 실체는 무엇일까? 보이는 그의 모습은 나약해 보였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로 보였다. 구세주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직 보이기만 하는 것이 그의 실체적 본질일까? 빌라도가 조롱한 보이는 그의 모습은 그의 실체가 아니다. 그의 우유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은 본질, 바로 그 실체다. 냉정한 마음으로 실체에 집중해야 한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의 본질, 그 실체에 집중해야 한다. 냉정한 마음으로 국가와 교회의 실체적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당장 보이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며 민중을 자신의 아랫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여전히 없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더욱더 냉정한 마음으로 국가와 교회의 실체적 본질에 집중해야 할 때다. 적어도 거짓말이 생존의 비법이 되는 세상이 되지 않기 위해 말이다. 보이는 것은 비록 초라하지만 보아야 할 그 실체적 본질은 탄탄한 그 무엇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보이는 것은 화려하지만 거짓으로 채워진 가식적 존재가 아니기 위해서 말이다. 더욱더 냉정하게 거짓을 도려내야 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아야 할 것에 더 충실하기 위해, 지금 더욱더 냉정한 마음으로 가려내야 한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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