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한상봉]

서점을 어슬렁거리다 손에 걸린 책 한 권이 있다. 제목이 별나서다. "제 정신으로 읽는 예수" (김경윤, 삶창, 2016)이다. 아마 이 책의 핵심은 예수를 ‘그리스도’가 아니라 ‘친구’로 불러야 옳다는 제안일 것이다. 예수를 ‘친구’로 부르면 “나자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인 ‘그리스도교’라는 말 자체도 바뀌어야 하니,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액면가 그대로 이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권위적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새겨들을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 사람과 집단이 쓰는 언어는 그들이 가진 가치관을 반영한다. 예수는 유대교 전통에서 태어나고 활동했지만, 정작 그리스도교는 로마 시대에 황제가 중심이 되는 언어로 자신을 표현했다. 중세에는 왕과 교황 중심의 언어가 교회언어였다. 지금도 아무런 반성 없이 그런 ‘교회 사투리’들이 사용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 언어가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교황’이라는 말이겠다. 교회 최고 지도자를 ‘교황’이라 부르면, 당연히 예수는 교황보다 더 높은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겠고, 그러자면 예수는 ‘나자렛 목수’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우리가 닿을 수 없는 하늘 높이 올라가 계셔야 한다.

예수를 우리는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부른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찬란한 영광을 구현할 세속 군주”이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며 종교지도자”였다.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왕)는 당연히 로마 황제뿐이다. 이건 모두가 아는 상식이었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니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은 체제 전복적인 정치적이고 불온한 언어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도 모질게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그리스도’는 로마제국의 통일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되고, 체제 순응적 언어로 변질되었다. 하느님나라를 향한 체제 저항적 활기를 잃어 버리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예수-그리스도’다. 그저 예수를 황제처럼 취급하는 권위적 언어가 된 것이다. 이런 교회언어가 민주적, 평등적 가치가 중요해진 지금도 교회 안에서 고스란히 사용되고 있다. 예수를 왕, 군주, 임금, 메시아, 그리스도로 표현하고, 신자들은 자신을 노예 취급한다. ‘주님’이라는 표현은 고대 사회에서 노예가 주인에게 부르는 호칭이다. 김경윤 작가는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현대에 살고 있는 고대인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했다. “일요일에는 고대의 노예로 살다가 평일에는 민주시민으로 사는 것”이 지금 그리스도인의 형편이라는 것이다.

▲ 길에서 두 사람과 대화하는 예수. '엠마오 가는 길', 프리치 폰 우데. (1891)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예수-그리스도’ 교리가 예수의 진술이 아니라, 예수 제자들의 신앙고백이라면, 지금 우리는 ‘예수-친구’라고 고백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라고 말했다.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다 하니, 더 이상 그분을 ‘주인 대접’해 드리는 것보다, 그분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 더 복음의 정신에 맞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한사코 우리에게 ‘친구가 되자’고 청하시는데, 우리는 ‘아닙니다. 주님’이라고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예수를 친구라 부르면, ‘예수와 더 가깝다고 강요하는’ 교회의 모든 성직자들도 평신도들과 마찬가지로 ‘친구’가 된다. ‘교황’이란 말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런 태도는 이미 “누구도 아버지라 부르지도 말고, 스승이라 부르지도 말라”고 충고하신 예수의 뜻에 따르는 길이 아닐까. 오직 하느님 압바만을 섬기며, 만인이 만인에게 형제로 친구로 살아가는 교회가 정말 예수가 생각했던 공동체 아닐까. 호칭만 두고 보면, 교회 안에서 사제는 아버지가 되고, 평신도들끼리만 ‘자매요 형제’인 셈이다. 이 불평등한 관계를 예수가 칭찬하실까, 염려된다. 교회 직무의 차이는 필요하지만, 차별 언어는 ‘체제 전복적’ 예수와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족으로 한마디 덧붙인다. 최근에 한.경.오 논란이 극심하다. 진보매체가 문재인 대통령을 함부로 다루고 있다는 논란인데, 부주의한 표현 때문에 논란을 자초한 언론 또는 기자들의 태도나 지나치게 ‘호칭’에 매달리는 네티즌들이나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호칭에는 물론 그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가 스며 있는 것이어서 네티즌들의 반발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나, 사실상 호칭은 민주적일수록 좋다. ‘그리스도’도 모자라 ‘그리스도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태도나 ‘대통령’도 모자라 ‘대통령님’이라고 부르는 관행도 민주사회에 역행하는 처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씨’면 어떻고 ‘여사’면 어떤가. 사실상 문제는 ‘우리들의 불신’이다. 진보언론조차도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불신에서 이 모든 논란이 비롯된 것이다. 토씨를 타박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몫을 수행함으로써 신뢰를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민주주의 하느님나라로 가는 길이 이리도 먼데,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꼴통 수구 원수들 앞에서 추한 모습 보이지 말자.

 
 
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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