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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가능성을 찾아서[서평 - 강변구] "마음의 연대: 비정한 사회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이승욱, 레드우드, 2015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관계’란 어떤 모습일까? 자본이 인간 노동력을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하듯이, 우리도 상대방을 하나의 상품(이익 창출의 수단)으로 대하고 있지 않을까.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를 통해서 어떤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가. 마치 담배 한 개비씩 빼내듯이 그에게서 빼먹을 게 없나 살펴보는 시선을 서로에게 던지고 있지는 않은가. 너무 과한 일반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는 무엇보다 자본가가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꼭 자본가만 갖고 있으리란 법이 있을까. 평생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력하게 길들여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심성을 갖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중세 유럽의 농민들에게서 무신론자를 찾기 어렵듯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대부분 자본 없는 자본가들일 수 있다. 남편이 아내를, 기성세대가 청년들을, 부모가 아이들을 착취하여 욕망을 채우고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가와 싸우기 전에 우리 안의 자본주의적 심성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 "마음의 연대: 비정한 사회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이승욱, 레드우드, 2015. (표지 제공 = 레드우드)
그러나 이 자본주의적 심성은 당연하게도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으로 심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역사가 겨우 200여 년에 불과하므로. 그러나 태어나는 그 순간, 아니 수정되기 전부터 아이를 키울 수 있느냐 없느냐, 부부가 일생일대의 결의를 다진 뒤 태어나서 바로 산후조리원으로 직행하는 요즘 아기들은 유전자를 따질 필요도 없이 자본의 세례를 받고 자본의 심성을 갖추어 나간다. 따라서 우리 마음의 자본가들은 인간 본성이 아니라 철저히 시스템에서 강제되어 내면에 자리 잡은, 각자가 모시고 사는 ‘사장님’들이다.

"마음의 연대"(이승욱)는 이런 자본주의적 심성의 사회에서 어떻게 ‘연대’가 가능한지 탐구한다. 연대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은 연대의 깊은 좌절 뒤에 제기된다. 희망을 찾을 수 없을 때 역설적으로 더 간절히 희망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연대를 어떻게 좌절시키는가. 멀리 볼 것도 없이 그냥 각자의 일터를 보자. 사람들은 지극히 파편화되어 있다. 하나하나가 마치 횟집 수족관의 광어들처럼 켜켜이 쌓여만 있을 뿐 서로 관심은 없다. 관계를 풍부하게 맺고 지낸다고 여기는 사람도 혹, 진정한 관계가 아닌 정서적 자원의 상호 거래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보자. 관심은 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정서적 거래는 상대방이 주는 것에 따라 나도 주는 것이기에 다르다. 여기서 누가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뭉치지만 상대방에 대해 진짜 관심은 없다. 언제 그물에 들려 나갈지 모르는 처지의 광어들이 왜 다른 광어에 관심을 가질까. 그냥 각자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이런 상태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회사에서 무슨 인간다운 정을 나누고 말고 하냐는 거다. 오히려 상처 입기 십상이니 관계의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다. 실제로 관계는 시시각각 표변하는 기상 상태와 비슷한 것 같다. 영원한 ‘맑음’도 없고 영원한 ‘흐림’도 없이 폭풍과 산들바람이 교차하는 종잡을 수 없는 양상이다. 더욱이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기업의 조직 구성원들 사이에 장기 지속적이고 신뢰할 만한 관계를 쌓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관계가 기상이라고 할 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조건은 대기의 구성 비율처럼 항상적인 것이 아닐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서 그럼 연대를 쉽게, 잘 한다는 걸까? 그보다는 우리가 고립과 외로움, 거기서 오는 수치심, 모멸, 무기력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는 데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를 더 깊게 절감한다.

사람들이 자본의 세례를 통해 얻는 가장 부정적 감정이 수치심이 아닐까. 자본은 매일매일 우리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경쟁을 시키고 진 사람에게는 수치심을, 이긴 사람에게는 수치에 대한 공포를 심는다. 수치심은 자부심을 망가뜨린다. 이렇게 되면 연대는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연대란 “자신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남을 도와줄 만한 존재가 아니라 느껴지는데 어떻게 연대라는 것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자본주의 사회를 소멸시키지 않는 한 연대는 불가능한가? 그게 그렇게 되는 거라면 자본주의는 또 어떻게 물리치느냐 말이다! 저자는 “마음의 연대”를 말한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그런 비통함을 느낀 사람들, 그렇게 감응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좌절하고 자책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런 마음, 에너지가 중요하다. 그런 감응이야말로 연대로 나아가는 가장 기본적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사회적 형식이나 조직 혹은 형태가 아니라, ‘마음의 연대’”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 조직이란 것도 그런 구성원들 간의 마음의 감응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조직하여 담아내는 그릇에 불과하다. 풍차가 바람의 힘을 조직하듯이. 연대를 말하면서 바람의 방향은 찾지 않고, 풍차만 쳐다본다. 그렇게 멈추어 버린 풍차 방앗간에서 ‘연대는 끝났어, 빌어먹을!’하고는 떠나 버린다. 그런 사람이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뭘까? 자신과 동일시한 조직 자체인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가졌던 희망인가. 좌절을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닫아 버린 마음의 문을 바라보자. 자본이 허용해 준 내 방은 고시원보다도 더 좁아서 마치 관처럼 작다. 그 문을 부수기 위해 절권도처럼 짧고 강하게 치는 법을 수련해야 한다.

연대라는 행위의 첫 시작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신의 선과 먼저 연대하라고 한다. 강한 수치심과 불신, 좌절이 있다면 그 전에 자부심, 신뢰, 희망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에 의지해 살지는 오로지 각자의 선택이다.

 
 
강변구 
출판노동자,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서 십여 년째 어린이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올해 3살 난 딸과 함께 지내는 새내기 아빠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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