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박병상]

근린공원 한쪽이 이팝나무로 새하얗다. 어느새 5월 중순이다. 6월에 가까워지면 피던 꽃이 서두른 건 그만큼 천지사방이 따뜻한 까닭일까? 지구온난화의 현상일지 모르겠는데, 모내기를 앞두었을 때 이팝나무는 만개했다. 벼가 익으려면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 저장한 보리마저 바닥을 드러낼 무렵이니 배고픈 사람이 많을 시절이었다. 엎어진 주발에서 밥알이 소담하게 들러붙은 듯 이팝나무의 새하얀 꽃더미는 배고픈 이에게 밥으로 보였나 보다. 그래서 이팝나무라고 이름을 붙였겠지.

유행처럼 근린공원의 조경수나 가로수로 많이 심는 이팝나무는 이맘때 아름다움을 한껏 선사하는데, 바빠서 그런가? 시민들은 그 존재를 잘 모른다. 산과 들로 카메라 들고 떠나지 않는다면 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직장이 있는 시민이나 직장을 찾는 시민이나 마찬가지다. 새 정부 들어서 일자리를 나누는 분위기가 늘고 저녁이 있는 생활이 익숙해지면 자연에 눈이 갈 여유가 생기려나? 기대하고 싶은데, 입시 준비, 취직 준비, 알바로 주변 살필 시간이 부족한 이 땅의 청년들은 자연을 잃었다. 그들은 이팝나무를 알까?

▲ 이팝나무. (이미지 출처 = Flickr)
스피드를 즐기는 이들이 한밤중 자유로에서 경주하듯 달리다 얼마 전 교통사고를 냈다. 속도를 즐기는 이는 가속페달을 힘껏 밟으며 추월하며 희열을 참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사고를 당한 이는 화가 치솟을 텐데, 자동차 사이를 고속으로 누빌 때, 옆 차선 운전자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일터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하는 이의 고충과 희망 따위에 궁금해 하지 않겠지. 목표와 경쟁으로 성패가 결정되는 회색 도시의 일상이 대개 그렇다.

캐나다에서 존경받는 이로 선정된 데이비드 스즈키는 어린 시절을 산과 들을 쏘다니며 살았다. 나중에 유전학자가 되어 대학 강단에 섰지만 그는 생명공학을 찬성하지 않았다. 돈벌이를 위한 유전자 조작과 위험천만한 핵폐기물을 내놓는 핵발전소를 반대하고 지구온난화를 예방하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다채로운 동식물이 어우러지는 자연에서 생태적 감수성을 배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데이비드 스즈키는 자신의 책에서 술회했는데, 모진 경쟁을 뚫고 대학교수가 된 요사이의 과학자들에게 자연은 무엇일까? 그저 연구대상이 아닐까? 황우석 사태를 일으킨 우리 과학이 그랬을 터인데, 요즘,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

우리 농촌진흥청의 과학자들은 농민이 사는 농촌의 진흥에 결단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농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전자 조작 벼를 시험하는 이유는 농민의 행복과 전혀 관계가 없다. 유전자 조작하면서 그 위험성을 검증하는 그들은 안심을 읊조린다. 개발하는 자가 위험을 검증하다니, 핵발전소 짓는 자가 안전을 책임진다고 우기면 저들은 믿을까? 소비자 생각하지 않은 핵발전소가 폭발했듯, 농민 없는 농업은 기업의 이익에 충성할 따름이다. 자본이 설치한 최첨단 시설은 농민을 외면한다. 그런 시설에서 재배하는 농작물은 어떤 소비자를 원할까? 우리 농업과학은 돈벌이를 위한 경쟁을 추동한다.

경쟁의 지상 과제는 돈벌이다. 돈벌이는 대개 투자를 위한 은행 돈을 요구한다. 이자가 붙는 은행 돈은 이익이 필수인데, 이익은 경쟁에서 승리할 때 보장된다. 경쟁에서 지면 퇴출이다. 모든 걸 다 잃을 수 있으니 남보다 서둘러야 한다. 그를 위해 과학기술은 아스팔트 도로를 깔고 건물을 높였다. 경쟁을 부추기는 과학기술은 끝 모를 석유를 요구한다. 그 과학기술은 이웃의 따뜻함이나 생태계의 아름다움을 배제한다. 후손의 삶? 그런 거 생각하지 않으니 경쟁은 내일을 두렵게 한다. 자신뿐 아니라 제 자식의 승리를 위해 경쟁을 멈추지 못한다. 우리의 교육이 그렇다.

▲ 풀밭에서 노는 아이들.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1992년 미국에서 발생한 ‘LA폭동’에서 한 거리의 청년은 “소리만 들어도 어떤 총인지 알지요!” 하며 자랑했다고 미국의 자연주의자가 개탄했다. 청년이라면 소리를 듣고 무슨 새인지 알아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를 되물은 그는 성적 경쟁을 부추기는 학교에서 빠져나가 자연으로 아이 손잡고 나가자고 학부모들을 설득했다. 자식의 내일을 위해 학원으로 내모는 우리 부모가 꼭 들어야 할 내용인데, 요즘 우리 광고는 첨단을 지향한다. 어린아이에게 인공지능을 선물하라고 꾄다. 엄마보다 기계 목소리가 더 친절하고 더 소중해야 하나? 인공지능이라는 과학기술은 어떤 내일을 선사하려 들까?

행사가 유난히 많은 5월은 ‘청소년의 달’이다. 신록이 단단해지기 이전의 계절인데, 자신의 철학을 다질 시기에 우리 청소년들은 무엇을 배우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몰두하는 걸까? 막연히 정의를 다짐했던 시골의 한 성적 우수생은 나중에 청와대 민정수석이 되어 국정농단의 선두에서 세상을 조롱했는데 그는 지금 후회할까? 산과 들로 뛰어다녔다면 더불어 행복한 사회정의, 세대정의, 생태정의를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았을지 모르는데, 데이비드 스즈키가 그의 소식 들었다면 참 아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경쟁으로 내모는 교육은 사실 교육일 수 없다. 이웃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생태계 없는 생존은 불가능하다. 후손의 생존을 해치는 성공은 겉 보기 아무리 화려해도 행복으로 이어질 수 없다. 친구와 이웃을 헐뜯고 조롱하는 세상으로 청소년을 인도하는 학교에서 우리 청소년은 도대체 뭘 배운단 말인가? 이번에 들어선 19대 정권은 정의로운 사회를 외쳤다. 5월 15일은 경쟁교육을 반성하는 ‘스승의 날’이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려나.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 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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