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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죄종과 인간 (하): 자유 의지와 뇌[박한선의 ‘세븐’ - 16]

상편- 감정과 뇌
중편- 이성과 뇌
하편- 자유 의지와 뇌

한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법원에 고발했다.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자신의 아버지를 고발할 수 있죠?”
그러자 그 남자는 답했다.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신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신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옳은 일이 될 수 있겠군요?”
“아니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신은 원래부터 옳은 일에 대해서만 기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시 물었다.
“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그 옳고 그름은 신이 결정한 것이 아니군요. 그렇다면 누가 결정한 것이죠?”

- 플라톤, "대화편-에우튀프론"에서 수정.

뇌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행동과 정서, 사고, 판단에 대한 이해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 뇌가 오른팔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혹은 소리를 어떻게 듣고 이해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도덕적 논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아무리 많은 것이 밝혀진다고 해도, 반대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인간 고유의 도덕적 판단에 이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우리가 어떻게 옳고 그름을 결정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는지에 대해서 전부 밝혀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간의 도덕적 판단에 대해 뇌 과학적으로 완전히 규명할 수 있다면, 과연 그러한 판단과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심지어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의 형질은 사실상 바꿀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잘해 봐야 이리저리 옮겨 탈 수 있을 뿐이다. 의지와 교육, 문화를 통해서 우리를 바꾸어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내가 ‘착한’ 일, 즉 칠주덕을 행하든, 혹은 ‘나쁜’ 일, 즉 ‘칠죄종’을 행하든, 그것은 이미 뇌가 결정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질투와 시기는, 변연계가 일으키는 감정 반응이며, 탐식은 시상하부가 결정하는 행동이다. 물론 이러한 욕구를 억제할 수 있는 ‘의지’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 ‘의지’는 전전두엽에서 담당하지 않는가?

   
▲ 우리의 생각과 감정, 행동은 마치 도미노 게임처럼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을 결정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이와 반대로 의지를 통해서 정해진 인과율을 거부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를 비결정론이라고 한다. (이미지 출처 = https://goo.gl/Q6eZQw)

이를 어려운 말로 결정론이라고 한다. 즉 어떤 결과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그저 ‘뇌에 의해서’ 그렇게 일어나도록 되어 있었을 뿐이다.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음욕을 품거나, 그 음욕을 억제할 만한 의지가 부족하거나 간에, 결국 뇌가 그렇게 하도록 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판사님.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제 뇌에 죄를 물으십시오.’라는 항변을 하는 강간범이 있는 것이다. 이를 생물학적 결정론(biological determinism)이라고 한다.

음욕 그리고 이를 억제할 의지는 타고난 환경이나 문화에 따라서 교육되고 훈육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역시 내 잘못은 아니다. ‘판사님.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저를 이렇게 만든 문란한 세상에 죄를 물으십시오’라는 항변이다. 타고난 환경과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니 말이다. 사회적 결정론(social determinism)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곧이곧대로 납득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면 혹시 옳고 그름 같은 것은 아예 없는 것이 아닐까? 절대적 기준 따위는 없으며, 모든 행동은 상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만 결과에 따라서 벌도 주고, 상도 주는 것이라는 식이다. 그 결과가 신의 만족이든 혹은 사회적 이익이든 말이다. 이를 상대주의라고 한다. 이와 정반대의 주장도 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원래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와는 무관하게 이미 어딘가 ‘초월적인’ 곳에 옳고 그름의 기준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래 옳으니까, 옳다’라는 식인데, 이를 신명론(divine command theory)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비결정론만큼이나 모순적인데, 이는 앞서 말한 에우튀프론의 딜레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면, 뇌 과학이나 정신의학의 영역을 벗어나므로, 이쯤에서 그치도록 하겠다.

   
▲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 (1787)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의 딜레마, 즉 ‘신이 명령했기 때문에 옳은가? 혹은 옳기 때문에 신이 명령한 것인가?”라는 유명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문답을 통해서, 기존 지식의 불완전함을 일깨우려고 하였지만, ‘이상한 질문을 하여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등의 죄목으로 결국 사형을 받았다.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많은 사람이 뇌 과학의 발달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희망 어린 시선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과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간의 행동 패턴을 모두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면, 정신 장애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기쁜 일이다. 치매도 우울증도 알코올 중독도 자살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기도 한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 모든 것이 다 밝혀진다면, 과연 ‘내’가 설 자리는 어디일까? 마치 의사가 내 머리에 전극을 달아, 마음을 읽고 감정을 조작하는 SF 영화를 연상시킨다. ‘나’는 계속 ‘나’일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인간의 뇌를 자동차에 비유해 보자. 우리는 많은 연구 끝에, 엔진의 구조와 구동 시스템, 조향 장치의 얼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뇌 과학과 유전학의 발전) 자동차가 고장 나면, 움직임을 멈추거나 혹은 폭주할 것이다(정신장애). 또한 보통 자동차는 정해진 차선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옳음). 물론 보행자를 치면 안 된다(그름). 자동차는 빠르게 움직이도록 정해졌고(생물학적 결정론), 교통 법규도 이미 결정되었다(사회적 결정론). 그러나 차가 원래 빠르기 때문에, 그리고 교통 법규가 미비하기 때문에, 보행자를 치었다고 항변할 수는 없다(결정론적 오류). 그렇다고 교통 법규는 원래부터 옳기 때문에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신명론).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마다 제멋대로 운전을 해도 되는 것도 아니다(상대주의).

당신은 자동차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자유 의지). 하지만 그렇다고 차가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다닐 수는 없다(인간의 숙명). 교통 법규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지켜야 한다(칠주덕). 난폭하게 차를 몰면 대개는 큰 사고가 난다(칠죄종). 자동차가 고장 나면 정비사에게 맡겨야 한다(의사). 아마 정비사는 자동차에 대해서 아주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의학 지식). 그러나 정비사는 당신이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한다. 단지 자동차가 움직일 수 있도록 수리해 줄 뿐이다(치료). 바람직한 목적지에 대한 조언은 아마 성경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진리). 하지만 자동차 핸들을 잡아야 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당신 자신이다. 어디로 가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에 달린 일이다.

자유 의지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개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자유 의지는 단지 뇌가 만든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고, 완전히 따로 실재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해리 프랭크퍼트나 다니엘 데닛 등 많은 학자들은 이른바 양립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즉 인간은 한편으로는 결정론적인 존재지만, 동시에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자동차와 같다. 도로 상황이나 법규, 차량의 성능이나 상태 등에 따라 운행 능력이 ‘결정’되며, 차는 하늘을 날 수도 물 위를 다닐 수도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운전자는 차를 어디로 몰고 갈지 ‘자유로운 의사’를 가지고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흔히 상황을 탓한다. 원래 좋은 자동차였다면 혹은 길이 잘 포장되어 있었다면 문제없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차가 고장났거나 길이 너무 엉망진창인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보다는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동차는, ‘대부분’의 길을 무리없이 잘 갈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정해진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욕정 등의 칠죄종은, 인생을 살아가는 교통 규칙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최소한의 조건에 불과하다.

   
▲ 왼쪽부터 서울대, 하버드대, 호주국립대의 모토. 서울대의 모토, ‘Veritas Lux Mea’는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뜻이다. 하버드대의 모토는 ‘Veritas pro Christo et Ecclesiae’(예수와 교회를 위한 진리)였는데 나중에 앞부분이 생략되어 ‘Veritas’(진리)가 되었다. 호주국립대의 모토는 ‘Naturam Primum Cognoscere Rerum’(먼저 자연의 본질을 알라)이다. 이들은 모두 ‘Cognoscetis Veritatem et Veritas Liberabit Vos’, 즉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요한 복음서(8,31)의 구절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긴 여행을 하다 보면, 간혹 실수로 규칙을 어길 수도 있다. 또 정말 위급할 경우에는 규칙 따위는 무시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래도 괜찮다. 사소한 교통 법규를 어겼다고, 큰 죄를 물을 수는 없다. 칠죄종도 마찬가지다. 죄라고는 하지만, 사실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있는 기본적 감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제 칠죄종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자’고 할 수는 없다. 마치 사소한 신호 위반의 습관이 점점 몸에 배면, 결국 큰 사고를 일으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앞서 말한 대로 자동차의 성능과 같은 원래의 ‘타고난 조건’도 중요하고, 도로의 상태처럼 ‘사회적 환경’도 중요하다. 충동을 이기고 법규를 준수하려는 ‘내적 의지’도 필요하다. 하지만 어디로 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다. 그러한 자유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자유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진리’다. 뇌 과학이나 정신의학, 분자생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의사는 진리에 대해서 별로 말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진리는 과연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아마 이 글의 독자라면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
지난 18개월 동안 칠죄종의 정신의학적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저 스스로도 많은 것을 공부하고 고민하게 만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최대한 전공하고 있는 정신의학이나 신경인류학의 영역에 국한해서 적어 보려 했지만, 불가피하게 신학과 철학에 관한 이야기도 살짝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내용의 오류가 있다면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박한선
경희대 의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대부속병원 전공의 및 서울대병원 신경신과 임상강사로 일했다.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과장 및 이화여대, 경희대 의대 외래교수를 지내면서,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정신장애의 신경인류학적 원인에 대해 연구 중이다. 현재 호주국립대(ANU)에서 문화, 건강 및 의학 과정을 연수하고 있다. "재난과 정신건강"(공저, 2015), "토닥토닥 정신과 사용설명서"(2016)를 저술했고, "행복의 역습"(2014), "여성의 진화"(2017)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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