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8]

- 인노첸시오 3세의 "인간 처지의 비참함" 읽기 3

1343년 만들어진 중세의 한 법령, 풍속감찰관 법령은 참으로 흥미롭다.

“기자 작위를 임명하는 예식의 경우, 집 밖에서 춤을 추는 것을 금지하며, 저녁 종소리에서 새벽 종소리에 이르는 밤 시간 춤을 추는 것을 가중 처벌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명예를 위하여 또한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이의 기사 작위를 받는 예식에서 축하한다는 이름 아래 춤을 추거나 혹은 광란의 행위를 하는 것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가 춤추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 만일 이러한 법을 위반한 것이 해진 후 30분이 지난 다음에 일어났다면, 처벌은 두 배로 커진다.”

한마디로 기사 작위를 받는 예식에서 축하를 빌미로 허영과 사치를 금지한다는 말이다. 늦은 밤까지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시끄럽게 즐기는 것도 금지한다는 말이다. 10세기 이후 무역과 상업의 성공으로 제법 큰 경제적 성공을 이룬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고민이 등장한다. 바로 ‘사치’와 ‘허영’이다. 사치와 허영은 그저 개인의 몫이 아닌 사회적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중세인들은 알았다. 경제적 성공을 이유로 남에 대한 배려 없이 언제 어디서든 대접받고 세워지며 누리는 것이 악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사회는 서서히 남에게 불쾌감과 불편함을 주는 사치와 허영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풍속감찰관은 과도한 사치와 허영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장례식과 이런저런 공식적인 만찬의 자리에서 때와 장소에 맞지 않은 사치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중세 그러한 규제는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13세기 후반인 1297년 시에나 정부는 몸치장에 대한 법령을 마련하였다. 사치에 대한 규제를 의미한다. 이어서 1343년 제정된 풍속감찰관 법령은 더욱더 제법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구체적 조건과 금액 그리고 의상 단속 기준을 마련하였다. 예를 들어, 여성의 몸매를 드러내기 위해 가슴 아래 혁대를 착용하는 것에 제한을 두었다. 부유한 여인들은 혁대의 착용을 금지시켰다. 그것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 사회적 악이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한 여인에겐 이를 허용했다. 그러나 이것이 나름의 제한이 있었다. 평판이 좋은 이웃 두 사람이 그녀의 가난을 증언해야 했다. 또 가난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노동으로 경제적 소득을 가지는 이라면 혁대를 허락하기도 했다. 또한 소년과 소녀의 견진성사와 세례성사의 과도하게 화려한 선물도 규제했다. 정확한 금액을 제시했다. 왜 이렇게까지 제한을 해야 했을까? 중세인들은 왜 허영과 사치 그리고 오만을 사회적 악이라고 보았을까? 왜 그것을 나쁜 것으로 보았을까?

▲ 사치와 허영을 부린 이들이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는 그림. (이미지 출처 = kr.pinterest.com)
인노첸시오 3세는 허영과 사치 그리고 오만에 가득한 인간 처지의 모습도 인간 처지의 비참함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 했다.

"교만한 이들은 잔치가 있을 때면, 그저 윗자리에 앉으려 하지요. 회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찾곤 합니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를 만나도 그저 인사 받기만을 즐기고, ‘선생님’이라 불러 주길 바랍니다. 그는 이름이 있지만 이름으로 불리길 원치 않습니다.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사회적 지위가 자신의 이름이 되어 불리길 바랍니다. 그는 한 명의 사람으로 존경받기보다 신으로 존경받길 원합니다. 다른 이들보다 자신을 더 높은 곳에 앉히고, 자신의 지위를 뽐내며 돌아다니고, 어느 자리에 그가 들어서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절하길 바랍니다."

인노첸시오 3세는 허영과 사치 그리고 오만이 왜 사회적으로 악인지를 적고 있다. 가진 이들은 사회적 지위를 통하여 자신을 확인한다. 자신의 진짜 이름보다 사회적 지위와 권세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는다. 그것을 더 좋아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남들과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지기보다 다른 인간과 아예 차원이 다른 신과 같은 존재로 높여지길 원한다. 자신들의 사회적 소유와 권세만 보일 뿐이다. 남들의 아픔은 보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허영과 사치는 결국 사회를 둘로 나눈다. 가진 자는 가진 지위와 소유로 자신을 확인받는다. 반면 사회적 약자는 고통 속에 살아가는 자신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는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자기 인식이 하나의 사회를 둘로 나눈다. 쪼갠다. 사회에 외상을 준다. 그러니 그냥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규제해야 했다. 사치와 허영 그리고 오만은 그대로 둘 수 없는 사회적 악이었다.

지금 우리를 본다. 가진 자들의 화려한 삶, 사치 그리고 허영은 당연한 것이 되어 가고 있다. 내 돈이니 내가 마음대로 한다는 당연한 권리 앞에서 돈 없으니 당연히 누리지 말라는 것이 당연한 아픔으로 남는다. 그 당연함 가운데 가난한 이의 아픔은 더욱더 깊어진다. 사치와 허영은 한 인간을 가해자로 만드는 인간 처지의 비참한 모습이다. 타인을 이기고 선 모습을 즐기며, 사치와 허영을 누리는 기쁨, 그 기쁨은 인간 처지의 비참한 모습 가운데 하나가 된다. 한 공간을 살아가는 이들을 둘로 나누는 무기가 된다. 굳이 눈에 보이는 무기를 들지 않아도 가해자로 만든다. 기쁨을 누리고 가해자가 되어 버리는 사치와 허영 그리고 오만, 그리 보니 인간 처지의 비참한 가운데 하나가 맞다.

조만간 우리는 우리와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갈 대통령을 선택한다. 부디 새로운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이 서글픈 인간 처지의 비참함을 조금은 덜 수 있길 바란다. 간절히 말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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