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4월 30일(부활 제3주일)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는 예수가 부활했는가, 하는 사건의 사실 관계를 따져 보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십자가에서 시신으로 내려온 예수가 부활했다는 증언까지 들었던 두 제자였다. 그들에게 다가선 예수는 낯설었다.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부활까지 알고 있는 제자가 예수를 몰라보는 이 괴리를 메꾸는 게 오늘 복음 이야기의 핵심이다.

예수에 대한 앎과 예수에 대한 믿음은 사실 다른 것이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라고 예수는 질책한다. 마음이 굼뜨는 건, 앎이 없어서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알고자 하는 것의 지향이 너무 강하기에 그렇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죽어 갔고, 제자들은 스승이라 모셨던 예수를 두고 흩어졌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흩어지는 여정을 걸었고, 이건 예수가 가르치며 다녔던 그 삼 년의 시간 동안 예수를 믿는 마음보다 예수를 확인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방증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두고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으로 확인하려 했다. 기존에 가졌던 ‘해방자’의 개념을 예수의 말과 행동에 투사하려 한 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였다. 그들이 보는 건,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듣는 건, 그들이 듣고자 한 것이었다. 자신들의 앎에 대한 강렬한 지향이 실제 예수를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렘브란트. (이미지 출처 = wikiart)
예수는 다시 두 제자의 앎을 고치고 다듬는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한 성경 전체의 내용을 다시 가르친다. 이 작업은 앎의 내용을 다른 내용으로 바꾸어 인식시키는 게 아니라, 인식의 프레임을 바꾸는 작업이다. 이건 상당히 어렵고 기나긴 작업이다. 기존의 앎에 대한 정당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건 자존의 이유와 지향을 부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예수는 빵을 나눔으로써 앎의 경계를 확장시킨다. 단순히 나눔의 실천이라며 예수처럼 이웃과 나누는 연민을 살아야 한다는 식의 상투적 해석은 그만 반복하자. 이건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철저한 분해며, 해방이고 나아가 자기 상실이다. 나누는 것은 예수 자신이요, 나누고 사라지는 것도 예수다. ‘내가 나누었다’고 말하는 자존은 온데간데없다.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로 대변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다시 살아나 움직이고 말하고 또 사라질 것이다.

부활을 사는 건, 제 의지의 해방에서 가능하다. 꼭 붙들고 내려놓지 못하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 내 생명을 갉아먹고 있을지 모른다. 죽고 또 죽는 것 안에서 생명은 어딘지 모를 미지의 세상에서 또 살아난다. 생명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살린다. 내 의지가 강할수록 주위가 죽어 가는 걸, 우린 너무 많이 경험하지 않았나....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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