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담긴 전례력을 따라 - 박유미]

– 부활의 첫 증거자 마리아 막달레나의 부활의 삶, 초대교회 여인들의 활동

부활절,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기쁨의 시간 50일에서 이미 열흘이 지나고 있다.

Quasimodogeniti, 새로 태어난 아기들처럼 순수하게, 그리고 Miserikordias Domini, 무한한 주님의 자비를 묵상하며 착하신 목자이신 주님을 묵상하고, Jubilate, 온 세상이 주님을 찬미하며, Cantate,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드리며, Rogate, 주님께 기도하고 당신 승천하심을 묵상하며, Exaudi, 성령을 보내심을 믿고 기다리는 시간.

부활절 전례와 풍습에 담긴 이야기들을 지나치긴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부활의 영광만 바라보지 말고 십자가를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을 잘 새겨 보다가 문득 '다빈치 코드' 영화와 함께 소설을 조명하면서 회자되던 이야기들에 대해 정리했던 내용이 생각났다. 초대교회의 교부 아우구스티노와 중세의 대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도들의 사도"라 부른 마리아 막달레나의 길,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삶. 부활을 증거하고 그렇게 살아간 대표적인 신앙의 모범이자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과 관련해서 늘 생각하게 되는 그분의 역사적 자취이기도 하다. 7월 그의 축일에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겠지만, 역사의 흐름 안에서 늘 새로이 이야기되는 안에서 부활의 증거자로서 그의 길을 오늘 다시 생각해 본다.

부활하신 날 아침 무덤가의 마리아 막달레나!

여러 형태의 무덤들 가운데 동터 오는 태양빛처럼 붉은 옷을 입은 여인. 선명한 붉은 색이 시선을 집중하게 한다. 슬픔에 잠겨 있지만 또 한편 무언가에 놀라 돌아보는 시선, 그의 얼굴과 받쳐 든 손에 비치는 빛이 그가 무엇을 돌아보는지를 가리킨다.

"마리아!" 슬픔에 잠겨 있는 마리아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아직 미처 그분을 알아보기 전이다.

히브리어로 아담과 에와라 쓰인 무덤의 돌이 깨져 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 어두움, 두려움, 상처.... 죽음. 하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의 빛으로 아담과 에와로 상징되는 우리들의 죽음 또한 이렇게 무덤을 부수고 부활함을 보여 준다.

▲ '부활 아침 무덤가의 마리아 막달레나', 지거 쾨더. (이미지 제공 = 박유미)
"라뽀니!" 생각지 못했던 만남의 순간!

그 순간에 머물 수는 없지만, 깊은 슬픔, 어두움이 희망 희망, 기쁨으로 바뀐다. 빛으로 새로이 열린 눈으로, 새로운 소명으로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

인간 예수의 모습을 그리면서 예수의 여인으로 자주 등장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소설'이지만 역사적인 사실들을 많이 엮어 담고 있어서 마치 '사실'처럼 거론되도록 되어 있는 '다빈치 코드'라는 책과 영화 때문에도 더 많이 언급되었던 것 같다. 마치 레고 쌓기처럼 하나하나의 사실들을 서로 다른 맥락에 연결해서 쌓으면 완전히 다른 형태가 나오듯이, 그렇게 역사적 사실, 또는 사실로 전해지는 것들을 서로 다른 시기의 틀에 집어넣어서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 놓은 이야기. 하지만 역설적으로, 남성 중심적 위계질서로 체계화된 교회에 대한 비판이 그리스도론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그려진 것 같은 이야기에 담긴 사실과 부활 증거자로서 그의 삶의 흔적이 나를 더 깊이 움직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사로잡았던 악령을 쫓아내어 주신 뒤 몇몇 여인과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했던 마리아 막달레나! 자신을 구원해 주신 분이기에 어떤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의 죽음을 지키고 주검도 깨끗이 모시려 했던 마리아의 사랑과 공경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특별한 사랑을 나타내 주셨다. 당신의 부활을 첫 번째로 보여 주셨다! 마리아 혼자에게였는지 함께 간 여인들에게였는지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복음사가들 모두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에게(또는 마리아를 포함한 여인들에게!) 첫 번째로 발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사회에서 절대로 효과적이지 않았을 사실, 주님 부활의 첫 증인이 여인들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로 인정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해서 초대교회 교부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라 불렀다.

아마도 아직 교회가 제도적으로 위계구조를 갖추기 전,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하여 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하고 그 영향도 컸던 듯하다. 사도 요한과 함께 계시던 성모 마리아의 영향도 컸을 뿐 아니라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 여인들, 그리고 제도화되는 교회 안에서 내 이름의 주보성인 수산나 성녀처럼 여성 부제들로 서품을 받고 일하던 분들도 있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저 '예수의 여인'이라 했다면 그 당시 사도들과 신자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100년이 넘도록 쓰여진 성서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몇백 년간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세우기 위해 고민하고 기도하고 논의했던 교부들에게 큰 인상을 남겨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먼저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을 전하라!"고 하셨던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분이 주신 새 소명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평생을 헌신했다.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에서만 아니라 낯선 이방인의 지역, 남부 프랑스까지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 지역에는 오랫동안 마리아 막달레나의 후손들이 믿음을 전하며 지냈다고 하며 그분을 기리는 순례지들이 있다.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순례를 가는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남성 중심으로 교계제도가 제도화되면서, 교회 안에서의 여성들의 지위가 억압받기 시작하면서 '사도들의 사도'라는 이름도 점차 거론되지 않았던 것 같다.

현대에 들어와서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위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관심이 새로와지면서 한편으로는 '예수의 스캔들'처럼 거론되기도 한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빙엔의 힐데가르트의 과감한(?!) 표현처럼 중세에는 '하느님의 에로스적인 정의'를 말하기도 했었다. 하느님의 사랑, 모든 것을 궁극적인 구원의 바른 질서로 이끌려는 그분의 정의는 무엇을 받을 것인지 계산하지 않고 그저 마음이 끌려 상대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어 하는 상태라는 것. 성 베르나르도는 '예수님과 뜨거운 사랑의 키스를 나누며 하나가 된다!', '그분의 젖을 마신다'고 표현한다. 성 베르나르도의 신비주의다. 그리고 모든 수도자들이 어머니처럼 젖을 먹여 주는 자, 예수님과 뜨거운 사랑의 키스를 나누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 방법은 극단적으로 몸을 고행시키는 엄격한 금욕주의였다!! 교회제도가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움직임들이 있었는지, 여성들에 대한 시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돌아보게 하는 역사들이다.

▲ 남프랑스 생 막시맹 라 생뜨봉에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 동굴. 마리아 막달레나 유해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동굴 안이 성당과 같이 꾸며져 있다. (이미지 출처 = goo.gl/images/cF1Ztr)

또 다른 갈래이지만, 11세기 십자군 전쟁 때에 군사적 힘으로 신앙을 수호해야 한다고 설립되었던 '시온 성전 수도회'. 14세기, 더 이상 군사적인 수도회가 필요 없게 되면서 이 수도회가 해체된 이후 남은 이들이 변화하는 속에서도 소수만이라도 그들이 익혀 왔던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지키려 만든 '시온 수도회'의 움직임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프랑스 메로빙거 왕조의 수호 수도회로 남았다고도 하는데, 이 수도회 안에 특별한 영지주의적, 밀교적 전례와 특성이 있어서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 특성 중 하나가 신적인 거룩한 여성 공경례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수도회에서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탄압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배경 때문에 '다빈치 코드'에서 '시온 수도회가 마리아 막달레나를 공경하는 이유로 교회의 탄압을 받았다'고 연결한 듯하다.

중세의 흐름을 잠시 언급했듯이 당시엔 하느님 신성의 여성적 면을 많이 강조하고 그리던 시기였다. 여성의 형상을 한 '성령', 자비와 사랑, 소피아, 소피아-그리스도, 소피아-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활발했던 때였었다. 시온 수도회의 '신적인 여성' 공경은 이런 맥락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공경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신성의 여성적인 면을 형상화해서 공경한 것이었겠지만, 하느님 사랑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구분하고 공경하는 것조차도 익숙하지 않은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인간적 관심이 더 집중되면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부활 증거자로서의 사도적 삶도 여성의 사랑으로 그려지며 축소, 왜곡된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는 셈이다.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기까지 십자가 죽음의 길을 함께하셨던 분, 부활을 처음 목격하고 "부활을 전하라!" 하신 말씀대로 부활을 증거했던 삶, 초대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신앙인들에게 깊고 넓게 자취를 남기고 있는 부활 증거자의 그 삶의 길에 오늘 더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과 특별한 사랑의 관계에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 그분의 삶이 오늘 우리의 부활신앙에 빛을 주는 것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는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이 상대에게만 머물러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처럼 '모두'에게로 확대되었다는 데에 있다. 비록 인간적으로는 떠나갔지만 그분의 뜻을 행할 때에 어떤 어려움에도 기쁨과 희망으로 늘 함께하심을 느끼며 살아갔다는 것! 순간을 평생으로 이어 펼쳐 가신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을 존경한다. 어떤 어려움 중에도 작은 만남, 작은 사랑 안에도 담겨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늘 느끼면 살아가셨을 그분 부활의 삶을 오늘 고통받는 이들과의 만남에서 주님을 느끼며 나누고 있는 가톨릭 여성들의 삶에 비추어 보며 그분들에게도 부활의 기쁨이 늘 함께하기를, 그 사랑의 빛이 거침없이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박유미 프리랜서(수산나)
서강대 사회학과, 독일 본, Friedrich-Wilhelm-Uni. 종교사회학 전공, 가톨릭사회론 제1 부전공,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에 대한 시대별 반향으로 본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 연구'. 학문과 일상생활, 교회 안의 신앙생활과 일상의 간격에 다리를 잇는 교육과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이 있으며 전례력과 성인들의 가르침에 담긴 사회적 배경 인식과 성찰을 통해서 사회교리의 보편성과 사회영성 일상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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