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4월 23일(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제자들은 두려움 가운데 예수를 만났다. 토마스는 의심 가운데 예수를 만났다. 두려움과 의심은 같은 게 아니다. 두려움은 문을 걸고 세상과의 단절을 가져오지만 의심은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온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는 부활한 예수를 확인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다른 제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예수를 보고 수동적 기쁨에 머물렀지만 토마스는 달랐다.

▲ '의심 많은 성 토마스', 피터 파울 루벤스. (1613-1615) (이미지 출처 = Wikiart)
토마스를 두고 불신의 아이콘으로 이해하는 건 부당하다. 그의 입을 통해 ‘믿는다’라는 말이 처음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토마스를 통해 믿음의 여정을 다시 되짚을 만하다. 요한 복음 자체가 ‘믿음’을 위해 쓰여졌다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고,(요한 20,31) 요한 복음의 첫장부터 ‘믿음’에 대한 요청은 끊임없이 제기된다. 믿음은 순도 100퍼센트의 완전함을 지향하는 게 아니다. 의심하더라도 나아갈 예수와 하느님에 대한 인내와 의지를 꺾지 않는 꾸준함이 믿음이다. 주어진 것에 기뻐하거나 기대치 않은 선물에 감격하는 건 누구에게나 쉽다. 믿음은 거저 얻어지는 사실 확인 차원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도대체 저게 뭘까?’라는 의심과 탐구를 거쳐 스스로의 자세를 고쳐먹는 게 믿음이라는 것이다. 성모님이 그러하셨다. 천사의 인사말을 곰곰이 생각한 뒤, 성모님은 메시아 예수를 받아들였다.(루카 1,29) 곰곰이 생각하다, 라는 그리스말은 ‘디아로기조마이’인데, 내적 투쟁이나 갈등을 겪는 고민을 가리킨다. 토마스 역시 부활한 예수를 받아들이기 위한 내적 투쟁을 시작했고, 그 끝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 역시 토마스의 길을 걷고 있다. 믿기 어려운 부활을 여전히 믿으려 애쓴다. 애쓰면서 서로 축하하고, 애쓰면서 부활을 살자고 서로 다독인다. 믿음은 원래 그런 거다. 의심으로 비틀거리고 주저앉더라도 믿음은 그 자체로 순수하고 정갈하며 완전하다. 어느 드라마에 유명한 대사란다.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냅니다.” 우리 신앙인들, 부활한 예수를 믿고 기뻐하는 것, 그 어려운 걸 우리가 해내고 있다. 대견하지 않는가, 우리?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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