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7]

- 인노첸시오 3세의 "인간 처지의 비참함" 읽기 2

10세기 이후 상업은 빠르게 발달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돈에 대한 욕심도 커졌다. 돈을 가진다는 것은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했다. 권력과 지배력 심지어 명예마저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만들었다. 돈은 여러 사회적 결핍 속에 아파하는 인간을 구원할 가장 좋은 수단으로 여겨졌다. 당시까지 사회적 약자였던 농노조차 많은 돈을 소유한다면, 무시 받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바로 돈의 힘이었다. 돈이면 오랜 시간 견고해 보였던 신분제 사회의 벽도 넘어설 수 있어 보였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조차 돈만 있다면, 자신들의 부족한 사회적 권력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돈은 희망이었다. 돈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돈은 만족을 알려 주지 않았다. 오히려 결핍된 존재로의 인간, 그 결핍의 허망함을 더욱더 분명히 직면시켜 주었다.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 결핍, 해결할 수 있는 존재론적 가난, 그것이 본질인 인간 존재의 처지를 알려 주었다.

▲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익명. (1216년경) (이미지 출처 = de.wikipedia.org)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것을 채우기 위해 더욱더 잔인해지고 더욱더 치열해졌다. 사람들 사이 돈을 향한 다툼은 심해지고, 다툼이 심해질 수도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보게 하였다. ‘나’만 있고, ‘남’은 필요 없었다. 그렇게 ‘나’란 존재의 외로움은 깊어 갔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외로움조차 더 많은 돈을 가지게 되면 해결될 것이라 믿었을지 모른다. 결국 더 많이 소유해야 했다.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믿었다. 그 소유욕이 커질수록 서로의 불행을 즐겼다. ‘남’의 아픔은 ‘나’의 승리였다. ‘남’의 불행에서 ‘나’의 행복을 보았다. 남의 불행에서 나의 행복을 보는 삶은 더욱더 ‘나’란 존재를 외롭게 만들었다. 홀로 있게 만들었다. 웃어도 홀로 웃고, 울어도 홀로 울었다. 다툼으로 가득한 세상, 남을 이기며 누리는 행복의 공간에서 행복의 주체는 한없이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의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 처지의 비참함을 더욱더 확실히 알려 주었다. 인노첸시오 3세의 "인간 처지의 비참함"의 한 구절은 이와 관련된 인간 처지를 이렇게 적고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이의 삶 전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로 가득합니다. 이런 저의 예상을 벗어나는 이의 삶은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구토한 토사물로 돌아오는 이는 없습니다. 자신의 배설물로 돌아와 나쁜 모습으로 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나쁜 짓’만을 즐기며 남을 속이며 좋아하는 이들이 있을 뿐입니다. 온갖 부정함과 부패 그리고 탐욕과 악독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 살의, 다툼, 거짓 그리고 악의에 둘러싸여 없는 말을 지어내어 거짓을 말하며 서로 욕하고 하느님의 미움을 사고 난폭하고 거만하며, 자기 자랑만 하고 악한 일을 계획하고 부모의 뜻을 무시하고, 분별력도 신뢰도 온정도 자비도 없습니다.”("인간 처지의 비참함" 중 발췌)

자신의 기쁨만을 위해 경쟁자를 미워하고 다툰다. 결국 얻으려는 것은 자신만의 기쁨이다. 홀로 가져야 한다. 나누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다. 거짓을 해서라도 홀로 독차지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간다. 남을 향한 신뢰란 필요 없다. 부모도 형제도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홀로’의 기쁨뿐이다. 자기만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며, 너무나 많이 먹어 토한 ‘토사물’과 ‘배설물’로 돌아와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그럴 시간에 더 이기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 할 뿐이었다.

▲ 사람들에게 돈은 희망이었고, 돈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돈을 향한 인간의 질주는 인간을 홀로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인간은 홀로 있기를 두려워한다. 그것을 참다운 행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더불어 있을 때, 참된 행복을 얻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이다. 중세 유럽인들은 조합과 같은 공동체를 만든다. 홀로 외로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있기를 선택한 것이다. 나 하나만의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존재를 위한 것이 나란 존재에 오히려 더 좋음을 알게 되었다. 상공업 모임인 길드 역시 다른 경쟁자를 이기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있지 않았다. 구성원 모두의 복지와 평안을 위하여 애썼다. 공적으로 모여 결산하고 남은 돈은 공공의 복리를 위해 사용했다. 조합원 가운데 가난한 이들과 나병환자가 있다면, 그들의 아픔을 돌보았다. 당시 공동체는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이지 이득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 이득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정말 경제적인 이유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오직 경제적 이득만을 목적해서는 안 되었다. 여럿이 하나가 되어야 했다. 그 하나됨의 힘은 서약서와 같은 종이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우애’와 ‘형제애’ 그리고 ‘사랑’이었다. 이것이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 처지의 비참함을 극복하며 살아가게 하는 거의 유일한 희망의 출발점이었다. 사랑해야 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이의 삶 전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로 가득’하다 했다. 그 가득한 죄는 자신의 이기심과 소유욕을 위한 삶을 살아가며 이룬 수많은 악행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삶은 죄로 가득하다. 이러한 인간 처지의 비참함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바로 ‘우애’와 ‘형제애’, 한마디로 ‘사랑’이다. 남의 아픔에서 자신의 행복을 보는 잔인한 사회에서 아무리 좋은 공동체를 법적으로 구성한다고 해도 온전한 행복은 불가능하다. 홀로 행복하자는 이들이 사랑 없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하여 참다운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처지의 비참함을 극복하는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남’의 아픔에서 ‘나’의 아픔을 마주하는 그 공감의 공간에서 홀로 있음의 ‘절망’은 사라지고 함께 있음의 ‘희망’을 보게 된다 믿는다. 인간 처지의 비참함, 그 이기로 가능한 삶의 죄악, 그 죄악을 해결하는 유일한 힘도 사랑이다. 결국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보에티우스의 사랑의 글을 읽어 보자. 인간 처지의 비참함을 이기게 해 줄 그 사랑을 생각하며 말이다. 홀로 있음의 절망에서 벗어나게 해 줄 그 사랑, 그 힘으로 함께 있음의 희망을 생각하며 말이다.

“누구도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오라를 씌울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 그 자체가 이 세상의 그 어떤 오라보다 더 훌륭하게 그들을 하나로 묶기 때문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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