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37]

마당에 서서 둘레둘레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하염없이 기쁨이 차오르는 계절이다. 산에는 산벚나무 꽃, 돌복숭아꽃, 집집마다 개나리꽃, 동백꽃, 들판에는 개불알꽃, 광대나물 꽃, 애기똥풀 꽃.... 더구나 밭을 갈지 않는 우리 집은 더욱이 꽃이 지천이다. 은방울꽃, 냉이 꽃, 배추꽃, 목련 꽃, 민들레 꽃, 딸기 꽃, 보리수나무 꽃.... 온갖 꽃들과 눈을 마주치고 있자면 '천국이 별 거냐, 여기가 바로 천국이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러한 때 특히나 내 눈길을 잡아 끄는 꽃이 있으니 바로 골담초 꽃, 벌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은 꽃이라 자꾸 호기심이 일었다.

'꿀이 얼마나 많이 들었기에 벌들이 저렇게 환장을 하고 달려들지? 한번 먹어 볼까?'

사실 꽃을 보면 눈으로 보는 데 그치지 입에 넣어 볼 생각까지는 안 하게 되는데 이상하게 이 꽃은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여, 한 송이 따서 먹어 봤더니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 정말 달다. 아사삭 씹는 순간 달큰함이 전해진다. 쓰거나 떫은 맛도 없다. 벌들이 달려드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지난해까지만 해도 이 꽃을 생으로 따 먹을 생각은 못 하고 말려서 차로 마실 생각만 했다. 하지만 날 것 그대로 맛을 보니 간식으로 따 먹거나 샐러드에 넣어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다랑이가 가까이에서 놀고 있기에 살그머니 불렀다.

"다랑아, 이 꽃 좀 같이 따자. 꿀이 잔뜩 들어 있어서 정말 맛있어."
"와! 나도 한번 먹어 볼래,"

먹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다랑이가 한 송이 먹어 보더니 예상대로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더니 연거푸 몇 송이를 더 따 먹는다.

"엄마 이거 바나나 꽃이야? 바나나 맛이 나네. 형아는 이 맛도 모르고 책만 보고 있어."
"그래? 그럼 가서 형아도 불러와. 꽃 맛 좀 보라고...."

▲ 다울이의 꽃 백과 골담초 꽃편. 요즘 다울이는 꽃을 보면 그리고 싶어 한다. ⓒ정청라

그리하여 다울이까지 불려와 꽃 맛을 보았다. 꽃 맛을 본 까시남(까칠한 시골 남자) 다울이의 소감은?

"나는 이 꽃을 꿀담초라고 할래. 정말 꿀맛이네. 약간 비린 맛이 나긴 하지만 말이야."

역시나 예민하고 섬세한 입맛. 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한다는 데는 동의한 눈치다. 신이 나서 꽃을 따는 걸 보면 말이다. 그 덕분에 나는 꽃 따는 일은 아이들에게 맡기고 구기자 순, 부추, 당귀 같은 다른 푸성귀를 따고 당근도 몇 개 캐서 부엌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샐러드 소스로 두부 크림을 만들어 두고 아이들을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이들이 너무 조용해서 할 수 없이 골담초 나무 있는 데로 나가 보았다. 애들이 아직 소식이 없는 건 꽃 따다가 딴 데로 샌 게 분명하다는 확신에 차서 말이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아직도 꽃을 따고 있는 게 아닌가. 지루한 줄도 모르고....

"아직도 꽃 따는 거야? 그만하면 됐어, 어서 들어와."
"그릇에 꽉 찰 때까지만....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꽃송이가 작은 편이라 양이 쉽게 늘지 않는데 아이들은 정말 국그릇 하나 가득 정도의 양을 따 왔다. 그것으로 두부크림 소스에 샐러드로 버무려 먹었는데 꽃 덕에 밥상이 다 환해진다. 평소 보기 좋은 밥상 차리는 데는 영 솜씨가 없는 편인데, 이런 나도 화사한 밥상을 차릴 수 있다니... 어깨를 으쓱하며 꽃샐러드를 입에 넣으니 정말 내가 우아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슬을 마시고 꽃으로 밥을 삼는 선녀라도 된 느낌이랄까?(어쩐지 밥도 좀 우아하게 먹어야 할 것 같아 평소보다 천천히 꼭꼭 씹어 삼키려 했는데 물론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우리 집엔 밥상 탐험가 다나가 있어서 말이다. 요즘 한창 재앙 부릴 때라 밥상만 보면 달려들어 반찬을 쑤시고 만지고 밥그릇까지 뒤집어 엎는 터라 그걸 제지하다 보면 밥이 코로 들어가도 모르기 십상이다.)

▲ 골담초 꽃 샐러드. 눈으로 먹어도 맛있다. ⓒ정청라

샐러드에 넣고 남은 꽃이 또 상당했다. 이것으로는 또 무얼 해 먹나? 마침 간식으로 떡케이크를 찌려던 차에 문득 꽃떡을 쪄 먹어 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언젠가 우리 조상들의 생활사를 기록한 책에서 찔레꽃이 한창일 때 찔레꽃을 넣어 시루떡을 해 먹었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찔레꽃으로 떡을 찐다면 골담초 꽃로는 못할까 싶어 혹시나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골담초 꽃으로 떡을 쪄 먹는다는 내용도 찾을 수 있었다.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 다만 '한다더라' 알고만 있는 것과 '나도 해 보자' 달려드는 것, 두 가지 길이 있을 뿐!)

그리하여 용기를 내어 달려들었다. 체에 내린 쌀가루에 꽃을 넣고 버물버물.... 쌀가루와 어우러진 꽃빛이 얼마나 고운지 눈이 먼저 황홀경에 빠진다. 그뿐인가. 쌀가루를 다루는 손은 성스러운 이를 모시는 듯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다. 만약 '요리치유', '요리예술'이라는 분야가 있다면 오늘 내가 하는 이 작업이 바로 그것이리라. 아름다움을 보고, 아름다움을 만지고, 아름다움으로 요리하고... 그렇게 해서 아름다움이 되고!(부엌에 선 나의 외관은 비록 남루할지언정 나는 그렇게 안으로 빛나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어떤 바람이 분다 해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이다. 이름하여 부엌데기 정체성!)

떡을 쪄 놓고 꽃을 꽂아 손쉽게 장식한 뒤에 아이들을 불렀더니 다랑이가 노래를 부르며 달려온다.

"나의 살던 고향은 떡 피는 산골~~~"

의도적인 개사인지 정말로 떡 피는 산골로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노랫말에 절로 웃음꽃이 핀다. 또한 세 아이들이 꽃떡 진짜 맛있다며 와구와구 먹어 대는 걸 보니 내 마음도 꽃처럼 피어난다. 아, 이게 바로 꽃 맛인가?!

▲ 맨 처음 도전한 골담초 꽃 시루떡. 아름다움을 먹고 아름다워질 수 있기를! ⓒ정청라

▲ 며칠 전 다랑이 생일에는 골담초&초코 떡케이크로 생일잔치를 했다. ⓒ정청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 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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