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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갈라진 세상에서 희망은 무엇일까[서평 - 강변구] "신약 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 박경미, 사계절, 2014
강변구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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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18  10: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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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은 세월호참사 3주기이자 예수 부활 대축일이었다. 거대한 몸뚱이를 모로 누인 세월호 선체는 지난 3년 동안 우리에게 생명과 진실의 소중함이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고,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처럼 어둠에서 진실의 밝은 자리로 나아가리란 것을 믿게 한다.

   
▲ "신약 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 박경미, 사계절, 2014. (표지 제공 = 사계절)
우리 모두는 세월호참사를 겪으면서 같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왜 그들은 사과하지 않을까.’ 법적 처벌을 피하려고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는 그렇다 쳐도 당시 책임 있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도의적, 윤리적 차원의 사과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어떤 사건이 있었을 때 잘못을 저지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게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보존과 통합이 목적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가정, 직장, 교회, 사회 등 공동체를 통합 유지시키는 가치가 보존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다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처벌이나 책임만 중요할 뿐,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받을 상처는 개의치 않는다. 세월호참사 뒤 시민들이 박근혜 씨에게 분노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우리 사회 공동체가 찢기고 상처받는 것에 극도로 무관심했다는 점일 것이다. 개인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 사회 공동체가 어떻게 되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극단적 자기애, 이기주의 앞에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가까운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유대 갈릴리 지방에 한 청년이 있었다. 그 이름은 예수라고 했고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하느님나라 운동을 펼쳤다. 또한 그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람이었다. "신약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의 저자 박경미는 예수의 이러한 활동을 바로 이스라엘 농촌 공동체 회복 운동이라고 설명한다. “갈릴리 민중은 오랜 세월 자신들의 전통, 즉 모세 계약의 전통에 따라 살아오던 마을 공동체의 삶이 파괴되는 위협에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위기에 빠진 나눔과 협동의 공동체적 삶을 부활시켜 서로 돕는 사회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했습니다. 또한 폭력에 기반한 로마 제국과 그 가신 왕들의 통치 때문에 자긍심을 잃고 갈가리 찢긴 민중의 마음을 치유하여 주체적인 삶을 회복시키고자 했습니다.” 로마의 압제는 유대 농촌 공동체를 경제적으로 착취했고, 마을과 가족이 고통 속에서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로마가 아닌 하느님이 다스리는 세상이었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 준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쳐 주어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의미가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겪은 고통 가운데 일부 지각없는 자들이 저지른 조롱과 모욕 행위들이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에게 공동체라는 개념이 있기 힘들 거라는 점이다. 특히 SNS 공간은 일면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관계 맺기와 끊기가 자유로운 개별자, 군집 또는 약한 네트워크를 이룰 뿐이다. 어떠한 면에서도 현실 수준의 공동체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 보니 SNS 공간에서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그냥 관계를 끊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의 행동이 종종 나타난다. 문제는 현실의 공동체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 때다. 예를 들어 어떤 직장의 노동 조직이 심하게 분열되어 있고, 개인들은 사적으로 친밀한 몇 사람과 소통할 뿐 전체 조직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상태라면 마치 인터넷 공간에서처럼 관계를 맺고 끊어버리려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갈등이 있었다면 서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러한 고통과 수고를 감내하지 않고 그냥 관계를 딱 끊거나 상대에 대해 관심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일하는 과정이 분리되어 있으니 업무에 지장이 있을 일도 없다. 다만 사적 친밀감을 채워 줄 누군가를 다시 찾기만 하면 된다.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늘 권력자, 압제자인 것은 아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상처를 주었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정직해질 줄 모르는 사람들이 상대의 마음에, 공동체에 칼집을 내고야 만다. 그 상처를 회복시키는 것은 늘 남은 자들의 몫이다. 흔히 “왜 부끄러움은 늘 우리 몫인가”라고 하지 않던가. 부끄러움만이 아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시시비비에서 정치적 정의로움, 그리고 예기치 않은 참사에 앗긴 생명의 소중한 가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공동체를 지키고 가꾸기 위해 바로 세워야 할 것들이 있다.

사실 공동체를 회복하는 힘든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유혹이 크다. 어차피 세상은 갈가리 찢겨 있지 않은가 말이다. 괜히 급류에 흩어지는 뗏목을 붙들려 하다가 내가 물에 빠질 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렇다면 과연 희망이 있을까. 너와 내가 화해하고 상처 입은 공동체가 다시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에 첫발을 디뎌야 하는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이들의 희망은 자기기만이 아니라 신성한 것들을 향한 존경에 근거했습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과 타자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신성한 차원을 향한 존경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흔히 말하듯 사람이 희망일까? 아니다. 사람 속에 있는 “신성한 차원”, 곧 세월호가 가르쳐 준 생명이라는 신성한 영역에, 나와 타인의 불화를 극복하고 사랑하며 나아가 우리 사회 공동체가 다시 회복될 희망이 들어 있지 않을까?

 
 
강변구 
출판노동자,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서 십여 년째 어린이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올해 3살 난 딸과 함께 지내는 새내기 아빠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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