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4월 16일(주님 부활 대주일) 요한 20,1-9

마리아 막달레나가 찾고자 했던 건, 예수의 시신이었다. 베드로 역시 죽음의 흔적인 아마포만 보았다. 예수의 부활 날, 빈 무덤은 우리 신앙인에게 하나의 숙제를 안긴다. 비어 있는 곳에서 무엇을 찾을 것인가. 예수는 없다. 예수가 사라진 곳에서 우리가 찾는 건 무엇인가.

‘다른 제자’는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다른 제자’는 믿는다. 무엇을 믿었는가, 우린 알 수 없다. 대개 예수 부활을 믿었다고 생각하지만, 확실치 않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게, 기적 같은 이야기로 접근하면 거의가 사실 관계를 따지는 데 몰입한다. 진짜 살았을까, 진짜 죽은 건 맞나, 하며 말이다. 간혹 믿는다는 걸, 맹목적이고 비이성적 감성팔이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부활을 이야기할라치면 늘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관점을 들이대며 의심의 눈초리를 치켜세운다. ‘다른 제자’가 믿었다는 건, 깨달은 것과 구별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믿음은 어찌 보면 사실을 받아들이는 전제가 아닐까. 상대에게 말해 보라며 잠시 여유를 가지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자세가 믿음이 아닐까.

▲ 예루살렘의 빈 무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다른 제자’는 믿었다. 그러나 아직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 ‘다른 제자’에게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확인과 점검의 대상이 아니라, ‘그래, 부활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경청의 대상이다. ‘다른 제자’는 이제부터 들을 것이고, 볼 것이다. 부활한 예수를, 그리고 그 부활 사건이 도대체 제 삶에서 어떤 가치와 영향을 제공할지 찬찬히 살펴볼 것이다.

요한 복음을 읽었던 첫 세대는 예수가 세상에 오지 않았으리라, 그 거룩한 하느님이 이 더러운 세상에 오셨을 리 없었을 거라 믿기 시작한 때를 살아갔다. 오지 않았으니, 부활은 애당초 존재치 않은 사건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믿는다는 건, 부활이 있다, 부활을 자명한 사실이다, 를 외치는 게 아니라 부활을 묵상하고, 부활을 살아 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하고 겸허한 사유를 시작하는 것이어야 했다. 우린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린 우리의 부활을 살피고 가꾸어야 할 책임이 있다. 언제까지 예수의 부활에만 목매달 것인가. 예수는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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